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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Heroes 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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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 Oct 02. 2024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캐리어


 그날은 짐이 매우 무거웠다. 크로스로 맨 가방에 배낭, 신발을 담은 손가방에 캐리어까지.

내가 서울역에서 향하던 지하철역이 홍대입구역이었는지 충무로역이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지하철을 타기 위해 캐리어를 끌고 가는 길이 꽤 복잡하고 정신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출퇴근 시간이 아니었는데도 환승역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넘쳐났다. 인파에 밀려 계단에 첫발을 디뎠다.

무슨 짐을 이리 많이 담아왔는지 끌 때는 미처 몰랐는데 캐리어는 들기 힘들 정도로 무거웠다. 뒷사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날수록 무거워지는 마음도 물건처럼 들고 온 가방에 무게를 더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뒤에서 "왜 이렇게 늦게 가는 거야?" 투덜대는 소리가 들렸다. 자리를 비켜주고 싶어도 일제히 한 방향으로 향하는 사람들 사이, 피할 공간이 없었다. 볼멘소리가 커질수록 조급해지는 마음과 다르게 계단은 점점 더 아득해 보였다.


 오른쪽 다리를 지렛대 삼아 캐리어를 받치고, 두 손으로 캐리어를 들어 올리는 동시에 오른쪽 다리를 한 계단 위로 이동시키며 뒤뚱뒤뚱. 한참 계단을 올라가는데, 별안간 가방이 가벼워졌다.

가방이 열려서 짐이 쏟아진 건가 싶어 내려다보니, 손잡이를 잡은  손 옆에 자그마한 손이 나란히 자리해 힘을 주고 있었다.

나에게 호의를 베푼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여 고개를 돌려 보았는데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셨다.

채도가 높은 녹색 옷을 세련되게 차려입은 자그마하고 가녀린 체구의 할머니.

함께 캐리어를 들긴 하였지만, 그 무거운 캐리어를 곧은 자세로 들고 앞서 계단을 질러 척척 올라가시는 게 아닌가.  아 세상에 너무 멋져! 몰아치는 경외심에 내가 나이가 들어 모습은 왜소해질지언정 지금 내 곁에서 나란히 짊을 지고 올라가시는 할머니처럼 정정한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세련된 감각마저 지닌다면 더할 나위 없고.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쏟아져 내리는 빛을 받은 할머니는 구세주 같았다. 아니 구세주였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올라가는 내내 거듭 감사 인사를 전했지만, 크게 전화하는 사람, 대화하며 걷는 환승객들 사이 나의 목소리가 닿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여 계단을 다 오른 후에 다시 감사 인사를 전하려 했는데, 계단을 마저 오르시자마자 인파 사이로 홀연히 사라지셔서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인사를 받으려고 건넨 도움이 아니라는 듯 툭 친절을 건네곤 바로 자신의 목적지로 향하신 듯했다.


도움이 필요한 순간 다가오셨다 돌연 자취를 감춘 할머니.

내가 할머니의 짐을 들어드린 것이 아니었다.

할머니께서 나의 짐을 같이 들어주셨다.

평소 내가 ‘약자’라고, ‘보호가 필요한 계층’이라 생각했던 분께 도움을 받았다는 것에서 왔던 그 생소함을 잊을 수가 없다.

나도 모르게 '취약한 대상'이라 여기며 그분들의 능력을 가두었던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다.

그날의 감동은 ‘쉬이 누군가의 가능성을 닫고 바라보면 안 되겠다’라는 생각과 더불어 ‘나 역시 취약한 부분이 늘더라도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이 되어야지’라는 마음가짐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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