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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 恥]

아이를 낳은 부모의 마음

by 오후의 책방

부끄러움
부모가 자식을 낳은 마음을 부끄러워할 치恥라 표현한다고 한다. 왜일까?

부끄러운 마음은 옳지 못한 행동과 마음에 대한 자기반성에서 비롯된다. ‘낯짝이 두껍다.’라는 말은 소위 self-feedback이 결핍된 사람들의 특징이다. 아침에 한 말 저녁에 바꾸는 사람, 딸 같아서 만져보았다는 사람, 갑질이 생활화를 넘어 예술화된 사람, 큰 소리내면 이기는거라는 사람 등 꼭 높으신 분들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높으신 분들이야 워낙 유명인들이시니 그런 일이 금세 알려지기 쉬워서일테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은 주변에 돌아보면 널렸다. 나라고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나?

초등학교 -그 땐 ‘국민학교’라고 했다. 워낙 아이들이 청소를 하지 않다보니 주임 선생님께서 묘수를 내셨다. 청소를 잘 하는 아이를 뽑아서 ‘상’을 주자는 것이다. 친구들과 난 선생님의 묘수를 꼼수라 생각했고 절대 착한 어린이가 되지 말자고 약속했다.
그런데 난 본래 바닥에 쓰레기가 버려져 있으면 가만히 두질 못하는 성격이다. 줍지 않으면 왠지 찝찝해서 결국 지나쳐 가다가도 돌아와 쓰레기통에 버리고 간다. 착한아이 강박증인지는 모르겠으나, 부모님께서 그렇게 가르치셨고 나도 그것이 옳은 행동이라 생각한다.
사건은 며칠 뒤에 벌어졌다. 휴식시간에 운동장에서 놀고 있었는데 쭈쭈바 봉지가 눈에 띄었다. 그런데 하필 그 때, 선생님께서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시는 것이었다. 아! 이거 어떻게 해야하지? 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사실 이런 고민자체가 우스운 일 아닌가? 그 어린나이에도 남들의 눈을 의식하고, 나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고민하다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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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발단이 된 이놈의 쭈쭈바

나와 남을 구별하기 시작한 순간 우리 행동은 결코 독립적일 수는 없다. 나의 강박증은 결국 쭈쭈바 봉지로 손을 이끌었고, 그걸 본 선생님은 ‘오늘의 착한 어린이는 누구누구입니다.’하고 교내방송에 발표하셨다. 아! 어디 숨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폭발했다. 속도 모르는 친구들은 와르르 와서는 칭찬받아서 좋겠다고, 말 나온 김에 운동장에 있는 쓰레기 다 같이 청소하자고 했다. 정말 순진하고 착하다. 그 때, ‘한 살 더 먹은 형’이 나의 양심을 푹 찌르는 말을 던졌다.
“야, 그거 선생님들 보라고 한 거 아니냐? 유치하게 그게 뭐냐?‘
아! ‘한 살 많은 형’ , 형의 한마디에 내 마음은 일렁였고, 중년의 나이에도 잊지 못하는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다오! 지금 어디서 무얼하며 살고 계시오? 당신은 지금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는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유치원에서 알았다.』는 책처럼 돌아보면 어린시절의 경험이 지금의 나에 반면교사가 된다. 옳은 행동이라도 나와 직접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일은 피해야 한다.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신중함과 경솔함의 차이이다. 부끄러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는데, 감상에 젖어 추억이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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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볼 줄 모르는 사람은 부끄러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이 무슨 결과를 초래하는지 모른다. 만약 전략적으로 취하는 행동이라면 그는 <정치가>이거나 <아주 나쁜 사람>일 거다. 굳이 정치가와 나쁜 사람을 같은 선상에 두지 않는 것은 정치가의 정신세계가 일반인과 다르기 때문이다. 국회에서 오래동안 근무했던 지인은 “그들의 권력탐욕은 일반사람의 이해수준을 벗어나 있다.”고 했다. 상식적인 범위가 아니기 때문에 상식 밖의 행동을 하는 것인가보다. 더욱이 모든 정치인을 싸잡아 나쁜 사람들이라고 하면 그것도 옳지 않다. 어쨌든, 오래전에 이 정치인들이나 높으신분들의 부패한 도덕관을 심각하게 고민했던 분이 계셨다. 다산 정약용이다.

목민심서를 지은 다산 정약용은 어떻게 하면 목민관이 올바른 치정을 할 수 있을까,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 세상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도덕과 인륜을 회복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의 결론은 상제上帝관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광암 이벽을 통해 만난 천주교의 영향 때문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지만, 그의 상제관의 핵심은 이기론에 치우치기 이전의 원시 유교에서 말한 상제관을 회복하자는 것이었다. 인격적인 절대자, 선과 불선을 가늠하고 잘못된 자를 징벌할 수 있는 통치자로서의 하느님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실패했다. 이기론에 치중한 성리학의 시대는 그의 주장을 들을 귀가 없었다. 조선 후기로 오며 더이상 조선이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것은 바로 그들,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들 때문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C1%A4%BE%E0%BF%EB_jeongyakyong.jpg?type=w3 수묵화가 김호석 화백이 그린 다산 정약용 초상


부끄러울 恥, 부모가 자식을 낳은 마음을 부끄러움이라 표현한다.
왜일까? 아이를 낳을 때 어머니는 수치스러움을 모두 감내해야만 한다고 한다. 말하지 않아도 그 힘든 시간과 순간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출산의 경험이 없는 사내들은 그저 입 다물고 아내를 보석처럼 귀하게 여겨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이유가 또 있다.

행여나 나의 자식이 '천지를 모르고 살까봐. 저를 태어나게 해준 부모와 조상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천지도 모른 체 날뛸까봐. 배은망덕한 인간이 될까, 늘 부끄러운 마음으로, 경계하는 마음으로 자식을 기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운 자 참 많은 세상인데, 정작 그 사람들은 하늘을 올려다 볼 생각도 않고 세상에 내려와 있는 하늘인 '사람'을 소중히 생각하지 않는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세상은 두려움을 모른다. 두려움을 모르는 세상이 참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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