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출근할 때와 퇴근할 때가 다르다. 가르쳐 준 적이 없는데 어느새 그 말과 그 행동을 한다. 마치 스폰지처럼 주변의 지식과 자극을 빨아들인다. 어느새 부쩍 자란 모습에 함부로 대할 수가 없다. 그 녀석 앞에선 말도 행동도 조심하게 되고 이젠 뭘 하나 시키더라도 생각을 물어보고 권해본다.
요즘 큰 아이에 대한 이야기다.
마흔하고도 둘이다. 직장생활을 하며 무언가를 배워보려고 시도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대부분 오래가지 못한다. 누군가가 작심삼일이라도 계속 반복하면 할 수 있다고 해서 지금은 그렇게 '버티고' 있다. 이런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중고등학교 때, 아니 대학교 때만이라도 되돌아갈 수 있다면... 그렇다면 정말 열심히 공부할 텐데."
아니, 이게 무슨 말이냐고? 젊음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못했던 연애나 여행을 하겠다는게 아니고 더 치열하게 공부할거라고? 그 지긋지긋한 고3의 시간과 취업준비로 힘들었던 시간을 반복하겠다고?
그래, 맞다. 그 이유는 '그 때는 왜 공부해야하는지 몰랐다면, 이젠 정말 나 자신을 위해 공부하고 싶다'는 이유 때문이다. 또한 나의 생리적인 몸이 그 때 만큼 유연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어가는 걸 언제 느끼냐고 묻는다면, 난 이렇게 대답할 거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 때요.
후배가 새로운 아이템을 말했다. 당장 나는 '아! 이거 윗선에서 짤리겠는데.'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조심스레 이유를 설명하다보니 왠지 내가 구차해졌다. 옛날 같았으면 내가 이런 류의 아이템을 갖고 들이밀었을텐데. 왜 지금 나는 위에서 까일까봐부터 걱정해야하지? 정말 그것이 걱정인건가. 아니면 내 생각이 벌써 굳어버린건가?
나이를 먹는다는 것, 지금 내 시점에서는 수치상의 나이가 아닌 생각의 나이, 마음의 나이가 문제이다.
한가지 이유를 더한다면, 가장으로써 온전히 나만을 위한 공부에 집중할 수 없다는 책임감 때문이다.
직장에서는 목표치에 맞는 반드시 해내야만하는 업무의 중압감 때문이고, 집에서는 절대적인 육아분담때문이다. 씻기고 밥먹이고 책읽어주고 내 몸은 지쳐가는데 한 녀석은 스파이더맨이고 한 녀석은 배트맨이다. 도무지 밤늦도록 잘 생각을 하지 않는다. 둘째가 말이 트이면서 두 녀석이 치고박고 장난을 치느라 더 심해졌다. 회사를 마치고 학원을 다니거나, 아침일찍 일어나 어학원을 다니는 건 먼나라 이야기다. 학원? 허! 어디 배부른 소리. 나 같은 중년의 직장인은 이제 "독학"만이 살길이다. 아이들이 자라고 내게 "자유시간"을 누릴 행복이 주어질지도 모르나, 아직 먼 이야기일뿐. 그러니 마음껏 배울 수 있었던 시간, 배움이 직업이었던 시절 [학생]이 참 부러운거다.
평생교육 개념이 널리 퍼지며 "배울 수 있는 나이"라는 건 의미가 없다고 한다. 그래도 스폰지 처럼 유연하게 세상의 온갖 것을 마음껏 빨아들일 수 있는 "젊음"은 정말 소중한 것이다. 배울 수 있을 때 배워야한다.
배우다는 말의 어원은
색이 스며들다는 '배다'라는 것, 아이를 배다와 같이 어떤 새로운 것을 만들다에서 나왔다 한다.
담배를 배웠다 같은 습관을 들이는 것도 배우다로 표현한다.
"타동사 ‘배다’의 의미는 이희승의 국어 대사전에 따르면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뱃속에 아이, 새끼, 또는 알을 가지다’라는 뜻이고, 둘째는 ‘아직 피지 아니한 이삭을 잎이나 껍질이 싸고 있다’는 뜻이다. 이 국어사전에 따르면 ‘배다’와 ‘배우다’는 함께 사용하고 있음도 알려준다. 또한 자동사 ‘배다’는 물 같은 것이 스며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타동사 ‘배다’ 역시 자동사의 이 용례와 어원적으로 깊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행위를 지시하는 장소가 사물의 내부나 인격 내부로 향해 있기 때문이다. 어떻든 타동사 ‘배다’에서 사역동사 어간 ‘우’를 붙여 타동사 ‘배우다’를 만들었다면, ‘배우다’는 장차 어떤 종류의 생명이 태어나거나, 열매가 맺게 될 가능성을, 한 인간 인격 안에 생기게 한다는 뜻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인간 인격에 있어서 생명 또는 열매라고 한다면 이는 앎(지식), 덕, 또는 깨달음 등으로 불릴 것이다. "
- 김용해 The Journal of SEC / 2010, Vol.2, No3, pp.17-29
단단한 돌에 색이 스며들긴 참 힘든 일이다. 핏빛 서린 한을 스며넣은 정몽주의 의지라면 몰라도..
다만 김용해씨의 말처럼 배움의 목적을 나의 내부로 향해 있다면, 진리의 깨우침으로 배움의 방향을 바로 잡는다면 나는 아직 늦지 않은지 모른다. 진리의 나이에 비하면 나는 아직 갓난아이에 불과하고 얼마든지 유연할 수 있으니까.
키케로는 '노년의 즐거움'에서 나이듦에 대해 참 많은 찬사를 했다. 이제 그 말을 내 삶에 스며넣어야 겠다. 반대로 우리 꼬맹이 두녀석에겐 너희들이 가진 축복의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자주 알려주어야 겠다. 귀담아 들어주면 좋겠지만, 욕심은 부릴 수 없을테다. 내가 그랬듯 시간의 소중함은 지나고 나서야 알게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