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가장 빛나는 순간을 기억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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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재국이다. 있을 재에 나라 국, 초등학교 2년에 학교를 그만두어야만 했던 아버지는 옥편을 찾고 유식한 분들께 물어 내 이름을 지었다. 혹시라도 찾아보면 알게 되겠지만, 이 두 글자는 웬만한 옥편에서는 '재'와 '국' 소리에서 제일 첫 번째로 나오는 글자다. 재자는 돌림자다. 돌림자는 부모와 자식 간에 음양오행의 원리로 상생이 되도록 이미 정해져 있다. 요즘에야 돌림자를 안 쓰는 사람이 많겠지만항렬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집성촌에 살았던 우리 사촌 팔촌 형제들은 모두 '재'자를 썼다. 어쩌면 가장 짓기 쉬운 이름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내 이름이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왜냐고? 어릴 적에 아버지께서 종종 해주신 이 말씀 때문이다.
'아부지가, 우리 아들이 나라에 꼭 있어야 할 사람이 되라고 지었다.'
주부와 술부의 해석과는 상관없이 아버지는 자식이 어떤 사람이 되길 바라는 그 한마음을 이름에 모두 담아주셨다. 나는 내 이름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요즘 푹 빠져 보는 드라마가 있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한 할아버지가 자신이 좋아하는 것조차 잊어버리기 전에 평생을 미뤄두고 양보했던 '가장 하고 싶은 것'을 이뤄나가는 드라마다. '나빌레라' 발레를 하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다. 어저께, 10화에서 큰아들 성산이 아버지 덕출의 알츠하이머를 알게 되었다. 연락두절이 된 아버지를 찾아 산에 오른 성산이 덕출을 끌어 앉으며 "아버지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아부지는 저한테 큰 산이예요."라며 목놓아 울었다. 그 순간 문득 주인공 가족의 이름 하나하나의 의미가 달리 해석되기 시작했다.
내가 작가도 아니고, 원작자도 아니니 그저 상상의 나래를 펼쳤을 뿐이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어찌나 아귀가 들어맞는지 입이 근지러워 참을 수 없어 B급 평론을 쓴다.
'아버지는 영원한 큰 산'이라고 말한 바로 그 큰아들의 이름은 '성산'이다. 아마도 이룰 성成에 뫼 산山이 아닐까. 그는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다. 실패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 안정적이고 탄탄한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책임, 아무리 힘들어도 꿋꿋하게 다시 일어나야 한다고 자신을 다그쳐 왔을 것이다. 삶의 모든 과정을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헤쳐왔다고 생각하는 그에게 딸 '은호'는 유약하고 답답해 보인다. 자신이 시키는 데로만 하면 그럭저럭 자신과 '비슷한' 삶을 살 것인데, 도무지 딸을 이해할 수 없다. N포 세대 혹은 MZ세대인 은호는 그런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불통한 사람이다. 10화에서 성산에게 위기가 닥친다. 앞으로 펼쳐나갈 이야기겠지만 그는 평생에 가장 큰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어쩌면 지금까지 믿어왔던 가치가 모두 무너지는 중년 시기가 기다릴지도.
아버지는 그의 이름을 지을 때 큰 산이 되길 바랬을 것이다. "산이 되어라. 큰 산과 같이 모든 것을 품는, 큰 버팀목이 되어주는 사람이 되어라." 장남으로서 개인의 삶을 희생해 온 그는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성산은 지금의 자신이 산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니다. 이제 그에게 진짜 산이 될 순간이 기다리고 있다. 아버지의 죽음, 딸의 독립, 회사의 위기, 내면 아이와 마주하기, 삶과 존재에 대한 회의. 그는 이런 작은 산을 넘어 마침내 큰 산이 될 것이다. 아버지의 바람처럼
남들이 다 부러워할 좋은 직업, 의사를 그만두고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겠다는 막내아들 성관, 그의 이름은 이룰 성成에 볼 관觀자가 아닐까? 의사라는 직업이 마주하는 삶과 죽음의 경계.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살아있음과 살아옴'을 보려고 한다. 진료실에서 마주하는 환자가 아닌, 그들이 삶 전체를 들여다보는 눈을 갖고 싶어 한다. 그의 카메라는 지금까지 겉모습을 보아온 눈(見)이 아닌, 삶 자체, 존재를 보는 관(觀)의 눈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세속적 권력과 부도 죽음 앞에서는 공평했으리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숙명지어진 죽음, 그 앞에서 한없이 나약해지는 모습들을 보아 왔을 것이다. '도대체 삶이란 무엇일까? 삶의 의미란 있는 것일까?' 버스에서, 길에서 정처 없이 떠도는 그의 모습은 인생의 길 위에서 방황하는 우리네 삶을 상징한다. 그런데 그의 눈, 아니 카메라는 이제 아버지를 향한다. 삶을 담으려는 눈-카메라가 '늘 지는 사람이었던 아버지'를 향한다. 죽음 앞에서 '이기는 삶,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 내려는 아버지를 담기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를 통해 삶의 의미, 삶의 목적을 보게 될 것이다. 어쩌면 다시 병원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마지막 순간까지 멈추지 않고 삶을 뜨겁게 하는 심장을 치유하는 흉부외과로.
아버지 심덕출, 그는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 지금껏 친구의 죽음을 목도해 왔던 그에게 죽음은 이제 현실로 다가왔다. 어릴 적부터 꿈만 꾸어온 발레는 ‘자신의 실존’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무엇을 좋아하는지 잊어버리기 전에,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는 현존재로서 인간 자신을 잊지 않기 위해 꿈을 향해 나아간다. 아버지란 늘 앞서 경험하는 이다. 성산, 성관, 그리고 채록 등 등장인물들이 아버지 덕출을 통해 조금씩 변해간다.
심덕출 그의 이름은 아마도 심心 덕德 출出일 것이다. 실제 마음 심자를 쓰는 한국의 성씨가 있는 줄은 잘 모른다. 그저 삶의 의지, 어른의 인자함, 한 사람이 살아온 삶 자체의 아름다움은 결국 그의 마음에 축적되었기에 마음 심자라고 믿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 내던져진다(出). 어떤 철학자는 목적도 의미도 없다고 했으나, 그건 그의 철학적 한계다. 서구 철학은 인간의 존재 문제를 피상적, 현상적인 해석에 치중한다. 반면 동양철학은 그 출발점을 우주원리에서 시작한다. 대우주의 축소판인 소우주-인간, 우리네 인생은 덕을 완성하는 데 있다. 자연의 변화원리를 도라 하고, 인간의 삶을 통해 진리가 현실화되는 것을 덕이라고 한다. 덕이란 도를 담는 그릇이다. 자! 어려운 이야기는 그만 줄이자. 그들은 알게 될 것이다. '아버지, 당신 삶 자체가 가르침입니다. 당신이 죽음 앞에서 우리에게 보여준 의지가 인간 삶의 고귀함, 품위입니다.'라고
이 모든 과정을 풀어나가는 관찰자가 있다. 때론 1인칭이었다가 덕출의 가족을 전지적 시점에서 바라보기도 한다. 어쩌면 그는 이 드라마의 진짜 주인공인 우리 관객일지도. 채록採錄이란 말은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을 뜻한다. 덕출은 알츠하이머로 사라져 가는 기억을 부여잡기 위해 수첩에 모든 것을 기록한다. 반면 드라마의 초반 가장 아름다운 시기에 채록은 자신의 빛나는 순간을 그저 흘러 보내고 있었다.
채록採錄은 덕출을 만나 지금 이 순간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지 깨달아간다. 그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역할은 관객의 시선에서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채록’하는 것이다.
또한 록은 사슴으로 써도 되겠다. 그러면 채록彩鹿은 빛나는 사슴이란 의미가 된다. 그 어떤 한자 조합이든 빛나는 순간을 상징하고 있다. 덕출이 채록을 처음 보았을 때 빛이 난다고 했던 것처럼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상상이다. 심지어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등장인물의 이름은 아직 모르겠다. 성산이 아버지를 향해 속내를 드러낸 것에 그저 감동해 나 혼자 펼친 상상의 나래다. 그래도 이들 캐릭터가 더욱 입체적으로 다가오지 않는가? 허구가 아닌 이제 나의 이야기로 보이기 시작하지 않으셨는지-
“당신의 이름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당신의 이름을 지을 때 부모님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당신이 우주에도 마음이 있음을 알든 모르든, 조물주를 믿든 믿지 않든, 한 번 상상해보세요. 우주의 긴 역사 속에 마침내 자신과 똑 닮은 인간이 태어났을 때 우주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한 번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