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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의 책방 Jan 08. 2024

나만의 길을 찾는 질문, 왜 좀 더 빨리 하지 못했을까

정무X오후 인터뷰 2부

https://youtu.be/RntoC2RL56A?feature=shared


오후 : 소설 속에 인물들이 움직이는 동선 그 공간이 굉장히 협소해요. 물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사 집 회사 집 뭐... 다른 곳 안 갑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주인공들이 만나는 인간관계라던가, 동선이 굉장히 협소한데 제가 느끼기에는 마치 케이지 안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 좀 들었어요.     

정무 : 핸드폰과 현실이라는 공간, 두 개를 계속 대비해서 소설이 전개가 되잖아요. 그런데 핸드폰은 사실 물리적으로만 보면, 화면을 엄지로 까딱까딱하면서 계속 벗어날 수가 없어요. 굉장히 제한적인 움직임을 함에도 정말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는 창이기도 하거든요. 그런데도 안 보죠. 날 때린 사람이 누군지만, 더 보게 되고. (때린 사람들만 노출이 되고) 이런 공간적 대비를 하고 싶었어요. 엄지가 이 안에서만 돌고 있고 더 멀리 나갈 수 있지만 그래도 항상 제한되어 있고. 현실 공간을 비교해 보면 서울의 아파트 동을 왔다 갔다 하는 답답함을 계속 연출하고 싶었습니다.     


오후 : 주인공의 나이가 32살이란 말이에요. 동양철학이나, 한의학에서는 남자의 경우 32살이 되면 인생의 전환기가 오는 시기라고 하거든요. 심리학자 '카를 융'이 말하는 중년에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시기, 그런데 그 전제가 뭐냐면, 자신이 추구했던 가치, 자신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게 다 무너진 다음에 바닥에서 다시 시작되는 전환점을 이야기하거든요. '영백'도 사실은 자기가 추구했던 게 한 번 무너진 거잖아요. 그다음 '케이스' 밖으로 나왔단 말이에요. 그렇다면! 자신이 무엇을 진짜 추구해야 될 것인지 생각할 시기를 왜 이렇게 나중에 하게 되는 걸까? 우리는 (나만의 길을 찾는) 시기를 조금 더 (이른 나이에) 할 수는 없었을까?

분석심리학을 창시한 구스타브 카를 융

정무 : 사실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수밖에 없는데요. 저희는 '다른 답'이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정답은 4번, 객관식 심지어 서술형 혹은 논술형이라는 출제 형식을 내신으로 봐도 '특정 키워드'가 들어 있어야만 부분 점수를 주는 조건부 부여 방식이지, 다른 답에 대한 얘기는 한 번도 하지 않거든요. 제가 기억하기로 중학생 때까지도 '다르다'와 '틀리다'를 구분하지 못해요. 제가 사람들과 '다르면 틀린 거'예요.  4번이 아니면 틀렸으니까,  '3번일 수도 있어요'라고 말하면 '네가 뭘 알아'라는 대답이 돌아올 수도.. 물론 이건 극단적인 예는 빼더라도. 다른 답이 없으니까 ‘모두가 선택하는 4번과 다르면 난 틀린 거야’를 19년 내내 학습을 하는 거예요. 모든 심리학자와 뇌과학자들이 얘기하는 10대 시절에 형성되는 성격과 뇌발달(연구가 있음에도) 그 시기에 모두 "나는 남들과 다르면 틀립니다"라는 문장만 계속 반복적으로 학습을 하는 거잖아요.

  

오후 : 소름이 돋네요. 

정무 : ‘난 남들과 다르면 틀립니다’를 19년 동안 하다가, 이제 와서 '너만의 길을 찾으세요'라고 하면 이미 성장이 굳어진 상태에서 다시 그걸 비가역적으로 뭔가를 하라고 하면. (너무 힘들겠어요) 사실 안 되죠. 그런데 여기서 어떤 콘텐츠가 또 소비될 수 있냐면, ‘안 되는 걸 계속하라고 하는 콘텐츠'가 생산이 되는 거예요. 안 되는 걸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해야죠. 사실! 필요하니까, 살려면! 잘 안 되는 걸 계속 반복적으로 하라는 콘텐츠가 생산이 되는 거예요. 예를 들면 '너의 꿈을 찾아라' '네가 하고 싶은 걸 해라'를 반복적으로 얘기하는 콘텐츠, 책, 강의들, 그런 게 계속 소비되는 거죠 20대 이후로는.     

오후 : 아는지 모르는지를 알려면 시험을 쳐야 되고 그리고 평가해야 되니까 객관식이 당연한 게 아니야,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것이 무의식 중에 차곡차곡 쌓여 ’다른 것은 틀렸다'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생각의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보니까 굉장히 소름이 돋습니다. 사실 인생은 주관식이잖아요. 각자의 다른 길이 있을 뿐이지 어떤 가치를 높게 낮게 평가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데,

정무 : 사실 사람 수만큼의 삶이 있을 뿐이잖아요

오후 : 조금 더 철학적으로 생각해 보면,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의 보편적인 삶의 방향은 있다고 생각을 해요. 그것을 찾는 것은 진리적이고 영적인 부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우린 각자 다른 개별성을 가지고 있잖아요.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각자의 우주‘가 맞는 말씀이라고 생각해요. 동시에 인간으로서 삶의 가치를 찾아야 되는 것, 보편적 가치는 분명히 있는 것이고, 이 두 가지를 항상 같이 생각하며 살아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영백이 여행을 떠나면서 머문 숙소에 '수처작주'라는 글귀가 쓰여 있어요. 숙소에서 일하는 분이 "어디에 있든 스스로 주인이 돼라"는 뜻이라고 알려 주거든요. 그런데 영백이는 '난 아직 난 모르겠다'라고 해요. 하지만 작가님께서는 그 뜻을 나름 정리를 하셨을 것 같은데...      

정무 : '수처작주' 다음에 '입처개진'이란 말이 있는데요. '수처작주'란 말은 '어딜 가든 주인이 돼라'는 뜻이고, 그다음 문장이 사실 더 중요한 문장인데요. 입처개진 '네가 머무는 곳이 곧 진리자리다'는 뜻이에요. 

 저는 이 문장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였냐면, 우린 멀리서 보면 의미 없는 존재일 수밖에 없죠. (멀리서 보면?) 누구든 멀리서 보면 다 의미가 없어 보이잖아요.

오후 : 광활한 우주에 조그만 별 하나에 사는? 

정무 : 네 그 작은 곳에서 아웅다웅 사는... 그럼에도 제 삶에 주인은 그냥 제 자신 하나밖에 없으니까, 제가 죽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뿐이잖아요. 그래서 첫 번째로 내가 주인인 거 잊지 말라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네가 걷는 길이 곧 너만의 길이다라는 걸 절대 잊지 말라고 전 그렇게 받아들였습니다.     

오후 : 물리학과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철학과를 가셨어도 참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후 : 영백이가 숙소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이 나와요. 이 부분은 한 번 읽어볼게요 어렸을 때 어머니와 대화를 나눴던 부분입니다.

 영백 : 엄마 내가 나중에 뭐 됐으면 해? 

 엄마 : 왜 학교에서 장래 희망 적어오래? 

 영백 : 응 

 엄마 : 나는 네가 고생을 안 하는 일을 했으면 좋겠어.

 영백 : 엄마 고생이 뭐야? 

 엄마 : 우리 아들은 안 했으면 하는 거.

 영백 : 엄마 그럼 고생은 누가 하는 거야? 

 엄마 : 공부 안 하고 말 안 듣는 사람이 하는 거야.   

 저는 이 부분에서 두 가지 정도가 떠올랐어요. 첫 번째는 엄마가 이 이야기를 할 때는 부모님의 세대가 얼마나 많이 고생을 하셨을까? 이 고생을 아들한테 대물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을 것 같아요. 그래서 공부 열심히 해라, 그래서 너는 꼭 성공해라, 이런 의미가 있었을 것 같고, 그러다 보니 아이가 살아갈 길을 스스로 선택하는 게 아니라 부모가 이미 방향을 정해버린 게 아닌가? 영백이 이 장면을 회상한다는 건, 여전히 자신의 삶에 대해서 스스로 찾는 시간을 갖지 못하고 선택하지 못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오후 :  조금 더 연장해서 말씀드리면 <맹인의 거울>, 이 소설이 주는 미덕은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구조'가 어떤지를 각성시켜 주는 것,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 생각해요. 그렇다면 작가님, 이 소설을 읽은 분이나, 또는 이런 문제를 많이 고민하고 계시는 분들은 분명히 이 구조를 보고 있다는 건데 알아차렸다면 그다음은 뭘 해야 될까요?      

정무 : 질문을 절대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많은 콘텐츠들이 있잖아요  '비교하지 마라, 만족해라, 핸드폰을 끊어라, SNS를 끊어라, 명상을 해라, 운동을 해라, 찬물 샤워를 해라.‘ 등등 온갖 여러 가지 콘텐츠들이 있는데, 오히려 스스로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게 유효한 방법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비교를 왜 할까?라는 제 나름의 답은 당연히 생명으로 태어났으니까 비교를 하는 거 아닌가? 에요. (당연히 비교를 하게 된다?) 네, 동물이라는 생명으로 태어났으면 당연히 비교를 하는 거 아닌가? 집단 내에서 개체 간의 경쟁을 하고 경쟁을 한다는 건 서로 반드시 비교를 하게 된다는 거잖아요. 생존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기질이 '비교'라는 생각을 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걸 부정할 수는 없고 관리의 영역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어떤 답을 말씀드리는 게 아니라 계속 질문해 보는 거예요. '나는 왜 비교를 하지?'. '나는 왜 매일 찬물 샤워를 하지?'. '나는 왜 매일 글쓰기를 하지?'. '나는 왜 매일 이렇게 남이 결정해 준 거 같은' '굴레에 빠진 것 같지?' 혹은 '왜 난...?' 이런 식으로 계속 질문을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오후 :  '이게 맞아?'라는 질문을 계속한다는 거죠? 

정무 : 네 그런데 제 생각에 인간의 특별한 점은 '자각'할 수 있다는 점이에요. 스스로 '이게 맞아?', '나는 '나'인가?' 이런 되게 허름하게 보이는 질문을 할 수 있는 동물이 정말 유일하게 인간이라고 생각을 해요. ‘나는 나인가?’ 근데 더 나아가서 이런 질문을 멈추지 않는 방법은 그냥 ‘용기’인 거 같아요. 정말 이것도 뜬금없는 소리가 될 수도 있는데...     

오후 : 저는 그 말이 이해가 돼요. 왜냐하면 그게 일종의 경계선에 선 사람들이 생각이거든요. 잘못된 구조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알면서도 순응한 사람들이 있고 하지만 거기에서 ‘질문을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셨잖아요? 그 질문을 계속하게 되면 결국에는 그 구조를 바꾸려고 노력을 하게 될 것이고, 떠나려고 노력할 것이고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될 거란 말이죠. 그래서 질문을 멈추지 않는 건 사실 ‘용기’가 필요한 거 같아요. “넌 왜 그런 질문을 자꾸 해?”, “야! 너는 그냥 시키는 대로 해!”라는 이야기를 반드시 듣게 될 테니까요.

정무 : 그걸 무릅쓸 용기인 거죠 '그냥'이라고, 답할 용기가 있으면 되는 것 같아요. 제가 그렇다고 '용기 전도사' 이럴 순 없어요. 저같이 겁 많은 사람이... 그럼에도 질문을 멈추지 않으면 그래도 조금씩 바뀌지 않을까요?      

오후 : 우리가 질풍노도의 시기를 이야기할 때 ‘내가 왜 태어나고, 나는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을, 어느 때 인생에서 반드시 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그 질문을 평생 늘 쥐면서 살아가기에는 현실이 참 힘든 것 같아요. 취업, 입시 같은 현실적인 이유, 사랑과 연애 또 재미있고 즐거운 우리 관심을 뺏는 것들이 너무 많으니까요. 근데 이 질문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란, 결국엔 ‘어떻게 살아가야 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계속한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굉장히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방법이네요 아까, ‘답은 없는데요’라고 하셨는데 굉장히 좋은 답인 것 같아요.

 마무리를 해야 할 시간인데, 저는 책을 아까 이제 세 번째 읽고 있다 했잖아요. 그러다 보니 이전에 읽었을 때 보이지 않았던 어휘, 상징이라든가 비유가 이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항상 숨 가쁘게 살아가는 사람들. 쳇바퀴 돌듯 사는 사람들을 표현할 때 모이를 줍는 비둘기라는 표현도 쓰시고, 특히 소설 전반에 걸쳐 ‘흐르는 강물’ 혹은 배경이 ‘한강’이거나 강물에 대한 비유가 자주 등장해요.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지 궁금합니다.     

정무 : 영백이 버스 창가너머 모이를 먹는 비둘기 떼를 보잖아요。 근데 그 묘사가 되게 한심해 보이고 막 안쓰러워 보이는 감정이 좀 섞여요. 영백이 비둘기를 대상화하는 거에 대한 풍자예요. 왜냐하면 영백이조차도 스크린이라는 공간에서 혹은 멀리서 보면 그냥 비둘기랑 구분이 안 돼요, 사실. 그런데 영백이조차 또 자기보다 하찮아 보이는 비둘기를 보면서 대상을 하고 있잖아요. 그런 풍자예요.

오후 : 우리가 남을 볼 때도 그럴 수도 있겠네요.

정무 : 항상 '견적을 잰다'라고 하잖아요 그런 풍자고요. 두 번째는 '연민'에 대한 상징을 담고 싶었어요.

오후 : 눈앞에 놓여 있는 것에만 집중해서 살아가는, 비둘기가 앞에 있는 것만 보잖아요 영백이 대상화시킨다고 했는데 그 대상이 뭘까, 생각해 보면? 

정무 : 사실 자기 모습이에요. 

오후 : 눈앞에 놓여 있는 거에만 급급해서 사실 좀 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아까 말씀하셨듯이 질문하지 못하면서 사는 거죠.

정무 : 그래서 핸드폰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줍듯 '툭툭' 부리처럼 (손가락으로)!

강물이 계속 반복적으로 등장하죠. 그리고 강물 위에 이파리가 둥둥 떠내려가는 장면도요. 어떤 의도로 썼냐면, 강물은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이란 의미로 썼어요. 근데 그 위에서 나무 이파리 하나가 퉁퉁 떠다니면서, 끝내 바다로 가겠죠. 강물은 물방울들끼리 서로 구분이 안 되거든요. 그런데 이파리는 살아 있었고, 사람 수만큼의 삶이 있었던 것처럼, 나뭇잎 수만큼의 삶도 있었을 거고. 그게 한 개개인의 삶을 강물 위에 떠내려가는 이파리로 비유했습니다.

오후 : 여러분들도 책 보시면서 상징, 비유를 하나씩 찾아내는 재미도 느껴졌으면 좋겠습니다.      


오후 : 해외판으로 번역이 되어서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킨들에서 9위를 차지하기도 하셨는데, 제가 이제 리뷰를 보다 보니까 영백의 경우는 원래 이 책에서는 한국어판에서는 물리학 전공을 했는데 해외판에서는 철학 전공으로 나오더라고요. 이렇게 해외판을 내시면서 구조나 배경이나 인물의 관계라든지 바꾼 게 어떤 것들이 있는지?

정무 : 번역가 선생님께서 ‘물리학과가 약간 취업이 잘 안 되는 학과로 그려진 것 같은데, 영미권에서는 오히려 물리학과가 취업이 되게 잘 된다!  이 학과는 철학과로 바꾸자’고 (그 문화권에 맞게?) 네, 철학과가 취업이 안 된다는 게 아니고요. 아니나 다를까 찾아보니 하버드대에 철학과에는 변호사 학위 과정이 항상 열려요. (철학과예요?) 네, 그런 거 보면 조금 잘 바꾼 거 같기도 합니다.

 두 번째로 작 중에 100만 구독자, ‘가난치료사’라는 이름이 등장하죠. 줄여서 ‘가치’라 하는데, 잘 지은 것 같아요. 가난치료사를 줄여 '가치'라고 했는데, 번역가 마크 선생님께서 이걸 ‘밸류’로 바꿨어요. ‘가치’를 발음하면 'Value'가 나와요. 이 단어를 풀면 ‘Validate Yourself- ‘널 증명해’가 돼요. 

오후 그렇군요. 아! 재밌네요. 고민을 많이 하셨을 것 같아요.  ‘가치’가 계속해서 이야기했던 것과 맥락이 딱 떨어지네요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정무 : 번역가 선생님이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해주셨죠.      


오후 : 마지막 질문이 가볍고 유쾌했으면 좋겠는데 사실 그런 질문은 또 아니에요. 심각하기로 했으니까, 우리 끝까지 심각하기로 하죠. 요즘에 '핵개인의 시대'라는 주제도 나오고 그 이야기는 언어만 없었을 뿐이지, 개인의 서사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는 전부터 이야기 돼 왔는데, 그럼에도 ‘소외’의 문제가 과연 해결이 될까?라는 의문이 들어요. 결국 사회 구조로 봤을 때 인플루언서들, 이미 유명세가 있는 사람들, 어느 정도 위치에 올라 있는 사람의 서사를 사람들이 관심 있게 지켜보는 것이지, 저 어느 지역 농촌의 촌로 이야기에 누가 관심을 가지겠느냐,라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아무도 안 봐준다고 해도 뭐 어때, 개인의 삶 자체는 존중받을 수 있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럼 이런 논의 자체가 필요가 없겠죠. SNS가 왜 필요할 것이며, 우리의 커뮤니티는 왜 필요하겠어요.

 우리가 지금 논의하고 있는 건 다 이 공간 안에서 사람들이 나의 이야기를 관심을 가져주는지, 나의 서사가 인정받는 것인지를 확인하고 싶어지는 거잖아요. 그렇게 핵개인의 시대가 도래하고 또 개인의 서사가 중요해서 서사를 쌓아간다 하더라도 과연 우리는 소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물음표가 생기더라고요. 하여튼 저는 '답 없다'입니다.     

정무 : 저는 '시도해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 같다'입니다. 제가 되게 흥미롭게 봤던 프로 중에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가 있어요. 방금 말씀하셨던 전혀 발견되지 않을 법한 사람들을 일부러 발견해서 이렇게 방송으로 내보내는 기획이잖아요. 제 생각에는 연결의 욕구를 가장 잘 해소시켜 주는 게 SNS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소외되고 어쩌면 배제되고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에 대해서 '이 사람 나만 알고 있는 것 같은데?'라는 기획이 좀 재밌게 연출된다면, 그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얘기하고, 어떤 공론화될 시도도 조금씩 해볼 수 있고, 그 콘텐츠를 소비하는 사람들은 '어! 나 이 사람은 나만 알고 있는 것 같아' '그리고 왠지 정감이 가는 것 같아' 이런 이해관계의 합치가 생긴다면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제 콘텐츠를 기획하는 단계에서 이걸 굉장히 재밌게 섬세하게 할 수 있는 건 저의 영역은 아니겠지만...

 

오후 : 저, 그 말이 되게 공감이 되는 게요. 그런 작품, 책, 작가님들을 저는 발견해서, '아! 이거 알았는데 여러분 어때요?'라고, '이 분 어때요? 이 책 어때요?'라고 그걸 하는 걸 즐거워하거든요. 저 같은 사람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소외 문제는? 100%라고 할 순 없어도, 이런 시도와 노력은 해볼 수 있겠다! 

정무 : 마치 인디 음반, 인디 작가들을 구독하는 것처럼요.

오후 : 노력하겠습니다! 하하. 이 책을 읽으시면서 마음이 많이 무거우실 수도 있고, 아! 이게 현실이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어요. 우리 사회 현실을 깊이 통찰하고 나는 질문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를 한번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맹인의 거울> 정무 작가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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