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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bin Sep 11. 2019

내가 보는 모든 것이 투사다.

사람들은 모두 투사를 한다. [투사 : 어떤 상황이나 자극에 대한 해석, 판단, 표현 따위에 심리 상태나 성격이 반영되는 일] 투사는 자연스럽다. 투사를 통해 세상을 본다. 내가 쓰고 있는 안경과 같다.


오늘 아침에 일기를 쓰고 있는데 귀뚜라미 소리가 들렸다. 그러다가 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바람에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도 들렸다. 저기 저 멀리서는 어떤 아이의 웃음소리가 퍼져왔다. 세상에 존재하는 셀 수 없이 많은 소리들. 그러나 내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다. 친구의 이야기에 집중하다, 갑자기 아이의 고함소리가 들려 달려가보았더니 고함소리가 아니라 꺄르르 웃음소리였던 적이 있다. 우리는 보는 것, 먹는 것, 만지는 것 ... 경험하는 그 모든 것에 투사를 하고 있다.



세상의 소리를,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내가 제대로 보고 있나를 생각하다가 내가 우리 아이들을 제대로 보고 있나?라는 질문이 올라왔다. 나는 엄마가 되고난 후, 우리 아이들에게 엄청난 투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알아차렸다.



첫째 아이가 태어났을 때, 이 아이가 나처럼 상처를 많이 받을까봐 전전긍긍했다. 상처받기 두려워하는 내면의 나는 이 아이는 상처없이 해맑게 크길 바랬다. 첫째 아이가 6살이 되고 동생이 둘 더 생기고 나서는 다른 투사를 했다. 잘 못 할까봐 두려워하는 내면의 나가 나타났다. 무의식이 나에게 하는 "좀더 잘하지! 왜 그것밖에 못해? 그 정도 해봤으면 이건 할 줄 알아야하는거 아냐?"라는 말이 첫째 아이에게 투사되어  "6살이나 됐으면 좀더 잘 해야지! 왜 이걸 못해? 6살이잖아! 이건 혼자 좀 해야할거 아냐?"로 튀어나왔다.



둘재 아이에게는 또 다른 투사가 있다. 사랑받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는 내면의 나가 둘째 아이에게 투사된다. 어쩌다보니 가는 곳마다 둘째의 또래 친구들은 없고 언니오빠들만 있다. 언니오빠들이 동생과 노는 것을 꺼리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언니오빠들 사이에 끼지 못하고 우는 둘째 아이를 볼때마다 사랑받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는 내면이 쿵쾅쿵쾅거린다. 나는 "왜 동생 괴롭히니! 동생이랑 같이 놀아야지!"라고 말하며 둘째 아이보다 더 서러워한다.



예전에, 아이를 있는 그대로 보세요!라는 말이 참 이해가 안갔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게 무슨 뜻일까? 나는 아이를 눈으로 정확하게 보고 있는데.... 이렇게 보면 되는 건가? 이제는 아주 조금 알것 같다. 내가 가진 결핍, 상처, 두려움... 등이 정리되면 아이를 있는그대로 보는 것이 쉬워진다. 그러나 나는 나의 투사를 절대 없앨 수가 없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있을 그저 "아... 내가 내 아이를 통해 나를 보고 있었구나. 나에게 이런 두려움이 있엇구나..."라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알아차림... 내가 공부를 하면 할 수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알아차림밖에 없는 것 같다.



우리 아이를 나의 상처가 아닌 아이 그대로 보는 것도 연습이 필요한 일이더라. 나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아이에게 많은 것들을 요구하고 과하게 제공하고 있지 않은지.... 아이의 진짜 목소리, 아이의 진짜 눈빛을 나는 제대로 보고 있는 것인지... 계속 알아차리는 연습.



나의 38살 안경이 괜시리 무겁게 느껴진다. 안경받침대가 걸쳐있는 코가 아프다. 잠시 안경을 내려놓고 아이들의 얼굴을 들여다 본다. 아이들은 38살이 아니었구나. 6살, 4살, 2살. 말간 얼굴을 한, 그냥... 그냥... 저로서의 아이다.   




Q1. 여러분은 어떤 안경으로 세상을 보나요?

Q2. 자신의 안경을 벗고 아이를 봤을 때 여러분은 무엇이 보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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