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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bin Nov 12. 2019

아빠의 첫 해외여행


우리 아빠는 한 번도 비행기를 타 본 적이 없다. 우리 아빠는 운전면허증도 없다. 그러나 우리 아빠는 텔레비전의 여행 프로그램을 좋아하고, 차로 바람 쐬러 가는 것을 좋아한다. 결혼 전, 주말마다 아빠는 엄마와 내게 바람 쐬러 가자고 하셨다. 어쩌다 엄마가 피곤하다고, 운전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냐고 하면 아빠는 아무 말 없이 그냥 티브이를 보셨다. 그러나 우리 셋은 꽤 자주 엄마가 운전하는 차로 바람 쐬러 다녔다. 우리 셋은 평소에는 별로 말이 없었다. 차 안에서도 말이 없었다. 그래도 한 공간에서 각자가 원하는 장면을 바라본다는 것이, 그리고 아름다운 장면을 함께 공유한다는 것이 편안했다. 바람 쐬러 가는 차 안은 집보다 아늑했다.


일요일마다 아빠는 바둑 방송을 그렇게나 봤다. 어찌나 지겨운지... 온 가족이 모이는 일요일 아침에 바둑 방송이라니! 집에 바둑판과 바둑알이 있으면 아빠가 바둑 방송을 안 보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을 담아 아빠에게 바둑판을 사자고 했지만 아빠는 왜 그걸 사노. 방송으로 보면 되는데. 라고 했다.  


아빠는 퇴직 후에 "걸어서 한국 여행"이라는 책을 구입했다. 아빠가 그 책을 다 읽었는지 어쨌는지 모른다. 그러나 친정에 갈 때마다 그 책을 보면서 기분이 이상했다. 하루 종일 티브이를 보는 아빠와 "걸어서 한국 여행"이라는 책을 산 아빠의 간극이 요원하면서도 짠했다.


지난봄에 아빠에게 첫 해외여행의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아빠가 계약금을 늦게 입금하는 바람에 가지 못했다. 해외여행을 못 간다는 소식을 들은 날, 아빠는 술을 거하게 마시고 우셨다. 계약금을 늦게 입금한 아빠와 그리 가고픈 여행을 못 가서 우는 아빠.... 아빠는 티브이와 신문으로 얻은 정보에 빠삭했다. 아빠가 그 이야기할 때마다 자식들은 듣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빤 말뿐이었으니깐. 우린 그때 어렸지만 알았나 보다. 말에는 힘이 없다는 것을. 행동이 없는 말은 공허하고 지루하다는 것을. 그리고 세상 물정을 다 아는 듯 말하는 아빠가 얼마나 순진한지도 우리는 알았다.


예전에는 말과 행동이 다른 아빠가 싫었다. 아빠가 말할 때마다 속으로 '아무것도 모르면서!'라고 수없이 외쳤다. 이젠 나이가 들었는지 아빠를 이해하기보다, 아빤 저런 사람이니깐.. 하게 되었다. 아빠를 삼십 년 넘게 경험하며, 아빠를 얼마나 간절히 바꾸고 싶었는지 모른다. 아빠에게 화도 내보고 짜증도 내보고 옳은 말도 해보고 무시도 해봤다. 아빠를 경험한 삼십 년 넘은 세월이 나에게 가르쳐 준 큰 교훈이 있다. '사람은 참 바뀌지 않는다'와 '사람이 참 내 맘같지 않구나', '내가 사람을 바꾸면 내가 하느님이지.'다. 그럼에도! 나는 꽤 많이 자주 사람을, 운명을, 인연을 내 마음대로 바꾸고 싶어 하는 나를 발견한다. 삼십 년 넘게 그렇게나 뼈저리게 경험하고 배웠음에도 애쓰는 나다. 나도 참 바뀌지 않네..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도 바꾸려고 기를 쓰고 달려드는 내 모습을 보며 나의 아빠 자리에 왜 우리 아빠가 있는지, 신의 계획을 알 것만 같다.

 

오늘 아빠가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셨다. 엄마와 함께 첫 해외여행을 떠났다. 아빠가 혼자서 여행 준비를 하길 바랬다간 아빠 평생 해외여행을 못 갈 수도 있다는 예감이 들어 그냥 내가 아빠의 여행을 준비했다. 여행과 자유를 간절하게 꿈꾸지만 행동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나는 받아들였다. 아빠에게 "이탈리아 어때?"라고 물으니, "가까운 곳도 괜찮다. 중국이나 동남아시아도 좋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아빠가 유럽을 얼마나 동경하는지 안다. 좀처럼 뭐가 좋은지 말하지 않는 아빠인데 한 번은 유럽의 한적한 도시를 보며 저기 한번 가고 싶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아빠 이왕 가는 거 멀리 가자. 이탈리아 가자."라는 나의 말에 들뜬 목소리로 "뭐 그래도 좋고"라고 말하는 아빠를 보며, 술이며 친구며 티브이며 원하는 것을 다 하며 사는 것처럼 보였지만 진짜로 원하는 것은 하지 못하고 산 아빠의 시간 떠올랐다. 아빠는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해 곁다리에 집착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출발"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아빠엄마의 사진이 카톡으로 왔다. 평소 사진 찍을 때 카메라를 쳐다보지도 않고 좀처럼 웃지 않는 아빠가, 사진 속에서는 엄마와 나란히 비행기 좌석에 앉아 카메라를 응시하고 씩 웃고 있다. 아빠는 어쩌면, 진짜 좋아하는 것을 행동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것을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행동파 아내, 딸을 만났는지 모른다. 이탈리아 여행 후에 아빠가 티브이도 적게 보고 술도 적게 마시고 좋아하는 일을 조금만 하길 바래보다가 아차차! 하고 정신 차려본다. 이탈리아 여행을 갔다 와도 아빠는 똑같을 거다. 사람은 참 변하지 않으니. 그래도 아빠의 삶에 아빠가 그리도 원하던 것을 하는 5박 8일이라는 시간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두 분 싸우지 말고 리아 바람 잘 쐬고 오시길... 마음이 아늑하다.



Q. 예전에는 이해 못했던 것이 이제는 이해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Q. 당신의 부모님은 당신의 삶에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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