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아니고 마흔] 다섯 번째 이야기
계모는 잘해준다고 하였겠지만, 계모의 배에서 막내가 태어났고 아버지는 천덕꾸러기처럼 밀려났다.
먹을 것도 귀하던 시절에 영양제까지 먹고 자란 막내 삼촌에 비해 아버지는 고등학교 입학금을 달라고 흙바닥을 뒹굴고 눈썹을 밀며 시위해야 할 정도로 돌봄 받지 못했다.
젖을 제대로 떼기도 전에 아버지의 생모는 아팠고, 방 고리를 열지 못한 채 갇혀 지내다 돌아가셨다. 고향은 이북, 혈혈단신 신랑을 찾아 내려와 한 많은 인생을 종했다.
늘 배가 고팠던 아버지는 걸음마를 배우기도 전에 문지방을 넘고 마룻바닥을 기어내려 가 흙을 주워 먹었다.
다행히도 아버지는 마음씨 고운 친척 아지매가 가여이 여겨 챙겨주는 밥과 사랑을 주워 먹을 수 있었다.
스무살이 되어서는 무작정 상경하여 중국집에서 숙식하며 배달일을 하였는데, 친척 아지매가 들려준 경찰수험서 한 권을 끄적끄적하다, 덜컥 순경이 되었다.
아버지의 아버지는 보부상으로, 전쟁 전에는 팔도를 돌아다니며 장사를 했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나중에는 재산을 모아 땅도 밭도 사고 장남과 차남을 대학에 보내고 신발 가게를 차려 줄 정도로 자수성가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형제들 중 유일하게 나랏밥을 먹는 '인재'가 되었다며 유산 상속에서 제외되었다.
훗날 나는 아버지에게 물은 적이 있다. "할아버지가 원망스럽지 않아?"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그 시절에는 다 어려웠어. 할아버지는 아들들을 모두 가르치고 싶어 했지만 내가 철이 없어서 정학도 당하고 이 학교 저 학교를 전전하고. 큰아버지들이 모두 실직을 하거나 살기가 어려웠는데 나만 직장이 있었으니... 그게 당연한 거야."
아버지는 스물, 서른, 마흔, 쉰, 예순...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도 가족들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많이 했다. 술과 여자에도 절제력이 부족했고, 분노를 억누르는 데에도 모자란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알 수 없이, 많은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위해 남들이 모르는 궂은 일을 다했고 가족들이 어려워하고 꺼려하는 일들까지 서슴없이 나서서 해결하였다.
내 기억 속에 아버지는 명확히 두 얼굴로 존재하는데, 더할 나위 없이 약하고 선한 어린 아이와 온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폭군의 모습이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가, 세월이 흐르고 나 자신에게 수없이 물었다. 젊은 나에게 내 삶을 묻지 않고 늙어가는, 망가져가는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삶이 뭐냐고 자주 물었다.
그래서 나는 젊은 날의 나로 당당하게 살지 못하고, 늙은 아버지의 삶에 얽매여 다소 후지게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