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아니고 마흔] 네 번째 이야기
4년이 걸렸다.
그 녀석에게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있다는 걸 알아차리는 데.
얼마나 쌔근거리며 숙면에 취하던지, 야생의 경계 습성은 완전히 상실한듯 허연 배를 드러내놓고 '큰 대'자로 누워 있는 녀석. 아무리 집이고 보호자 옆이라고는 하지만...
속.눈.썹. 방금 풍성하고 촘촘하게 가지런한 그 눈가의 털은 속눈썹이던가.
개에게도 속눈썹이 있다는 그 흔한 사실이 이토록 새롭고 강렬할 줄이야.
그랬다. 이리 길고 어여쁜 눈썹을 가진 개였다, 너란 녀석은.
간식을 받아내기 위해 패드 위에 쉬를 하고선, 한 번 짖고 따라오라는 시늉을 하곤 간식장 앞에 가서 서있는 걸 보면 이 녀석은 더이상 개가 아니구나, 감탄을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종종 쏟아지는 눈물 때문에 혼자 이불을 뒤집어 쓸 때에도 어느 샌가 이 녀석은 달려와 이불 속에 파고들어 눈물 콧물을 핥아준다.
정말 슬픔을 함께 느끼는 것인지 눈물의 짠내가 강렬해서인지 알 수 없지만 사람이 사람을 위로하지 않는 시대에 이런 일을 겪으면 개가 사람보다 낫다는 확신이 들 것이다.
오래도록 내게서 일어나는 감정의 폭풍우와 그 찌꺼기들에 허덕이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진 않은지 생각해보게 된다. 반만 보고 살아온 건, 세상이 내게 다 보여주지 않아서가 아니다. 내 눈과 지각 능력에 이상이 생겨서는 더더욱 아니다.
그건 내가 의식하지 못한 나의 게으름과 편협함 때문일 것이다. 세상이 아닌 나 자신을 향한 그 맹렬하고 반짝반짝한 시선. 나를 보고 울고 웃는, 나르시시즘 때문에 내 주변을 보는 데 소홀했던 것.
소홀했기 때문에, 반만 보이고 반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