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카버라는 미국 작가 단편집 <대성당>(김연수 역)을 읽은 건 수년 전이다. 십여 년 전 이태원 어느 커피숍에서 만난 한 드라마 피디가 권해서였다.
당시 일간지 문화부에서 일하던 나는 ‘여자 드라마 피디, 그들이 사는 세상’을 기획하고 있었다. 그때에는 지상파 드라마 피디 중 여자가 흔하지 않았던 때라 그들이 울고 웃는 리얼 현장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는데, 엄중한 직업의 세계에서 이 ‘여자’라는 한계와 구분이 마뜩하지 않았을 텐데도 섭외에 응해준 분들이 있어 기사는 무사히 출고되었다.
그러나 정작 이 기획의 모태가 된 드라마를 만든 그는 섭외를 거절했는데, 안면도 없는 사이에 전화로 갈음해도 될 일이었지만 커피숍으로 직접 나와 주었다. 자전거 타기를 좋아하다 벌어진 일들, 이태원 곳곳 저렴하면서도 이국적인 싱글하우스 등 일상의 수다를 마치고 그는 커피값을 친히 계산하고 자리를 떴다. 그즈음의 나는 한창 일에 치여 있었고 움직이는 모든 공간과 쪼개 쓰는 모든 시간을 몽땅 지면 안에 활자로 갈아 넣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목적이 성사되지 않은 그녀와의 한담에 한동안 멍해 있던 기억이 난다. 어딘지 어색하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던 순간이었다.
본래 알던 사이도 그 후로 알고 지내는 사이도 아니었던 그를 이렇게 오래 기억하는 건 바로 카버의 책 때문이다. 헤어지는 길에 그는 주목할 만한 작가로 카버를 소개했다. 문학에 문외한이었던 내게 카버의 단편집은 그 단정한 톤과 삼삼한 플롯, 읽은 후에 정수리에 내리 꽂히는 듯한 칼 같은 진실 때문에 남다른 서늘함을 주었다. 그러나 그 서늘함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듯 온몸을 따뜻하게 감싸는 삶의 온기 또한 이 책은 품고 있다. 마치, 안다고도 모른다고도 할 수 없는 그녀와의 짧은 만남처럼.
<대성당>에 수록된 단편 중 인상 깊은 작품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과 ‘대성당’이다. 사실 오래도록 이 단편의 백미는 ‘대성당’(나중에 소개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지만, 얼마 전 소설가 박완서의 에세이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에 ‘별 것...’에 관한 작가의 소회가 실린 것을 보고 마음을 울렁인 글이 두 개였다는 걸 깨달았다. 가끔은 내가 모르는 나, 내가 설명하지 못한 나를 누군가가 일깨워 줄 때가 있듯이.
‘별 것...’의 내용은 자식을 잃은 상심에 관한 것이다. 하워드와 앤 부부에겐 여덟 살 된 아들, 스코티가 있다. 스코티의 생일 직전 앤은 쇼핑센터에 있는 제과점에 생일 케이크를 주문하러 가고, 빵집 주인은 전화번호와 아이 이름을 받아 적고는 퉁명스럽다. 서른네 살, 좋은 학벌과 직업에 양친 모두 건강하고 형제자매들이며 동창들까지 잘 나가는 주변인을 둔 앤은 상냥하고 행복한 모습이다. 늘 그렇듯 불행은 영원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평화로운 한중간에 덜컥 제 모습을 드러낸다.
스코티의 생일날 아침, 스코티는 다른 날처럼 걸어서 학교에 가고, 다른 아이들과 포테이토칩을 나눠 먹으며 생일파티에 무슨 선물을 받을지 안달을 한다. 그런데 인도에 발을 헛디디면서 지나가던 차에 곧바로 치이고, 아이는 비틀거리지만 곧 멀쩡하게 일어난다. 울지도 않고 어떤 말도 안 하고 학교에도 안 가고 스코티는 집으로 돌아온다. 돌아온 아이는 앤에게 사고당한 이야기를 하고 곧장 소파에 축 늘어지더니 의식을 잃는다.
이때부터 아이는 의식불명의 긴 잠에 빠져든다. 의사는 곧 깨어날 거라는 말만 반복하고 앤과 하워드 부부는 초조하고 불안한 밤을 맞는다. 여러 가지 검사를 하고 주치의도 바뀌지만 아이는 여전히 깨어나지 않는다. 부모는 한잠도 못 자고 아무것도 못 먹는 동안 의사는 한결같은 말을 한다. 곧 깨어날 겁니다.
못 먹고 못 자는 부부는 번갈아 집에 들러 옷이라도 갈아입으려 한다. 이때 남편 하워드가 이상한 전화를 받는다. 주문한 케이크를 왜 안 찾아가느냐는 항의 전화. 아무것도 모르는 하워드는 딴청을 부리고, 장난질을 당했다고 생각한 빵집 주인은 슬슬 화가 나 막말을 하고 전화를 끊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하워드는 당황하고 공포감에 사로잡힌다. 병원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그 이야길 하지만 아내는 생일 케이크를 주문한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다.
다음날 새벽 5시. 이번엔 앤이 집에 와있을 때였다. 전화벨이 울리고 빵집 주인은 갖은 비아냥을 해대더니 마침내 스코티를 잊은 거냐며 서늘하게 묻는다. 앤은 폭발한다. 이 못된 새끼야!! 참다못한 앤은 소리 지른다.
아이는 병원에 온 지 사흘 만에 눈을 떠 엄마 아빠를 보는 듯하더니 이내 다시 감고 영영 숨을 거둔다. 아이가 숨진 뒤 정밀 검사 결과가 나오고, 아이의 병명을 그제야 알게 된다. 진작 알았으면 아이를 살릴 수도 있지만, 딱히 병원을 탓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정확한 진단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걸린 것이고 아이는 그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부부가 돌아오자 또 전화가 걸려오고, 윙윙대는 제빵기계 소리가 들려오고, 앤은 그때에야 질 나쁜 전화의 주인이 빵장수인 것을 알아차린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앤은 남편과 함께 빵집으로 돌진한다. 빵장수는 사흘이나 지나 상한 케이크를 내놓으며 거저라도 가져가라고 비꼰다. 앤은 네가 이럴 수가 있느냐며 폭언을 퍼붓고 옥신각신 불통의 고성이 오간 후에야 빵장수는 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본래 퉁명스러운 성품이지만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사과하는 빵장수. 그는 거듭 잘못을 사과하며 앤 부부를 의자에 앉힌다. 그는 자신이 그렇게 못된 사람은 아니라고 변명하면서 오븐에서 갓 구운 따뜻한 롤빵을 내놓는다. 부부는 롤빵을 먹기 시작하고 한 입, 두 입 거듭 빵을 집어 먹는다. 앤은 허기를 느끼고 끊임없이 포크질을 한다. 빵장수는 커피도 내놓는다. 그는 사과를 멈추지 않으면서 자신에겐 아이가 없고 이른 시간에 일어나 늦은 밤까지 빵을 굽는 똑같은 일만 해왔다는 이야기를 한다. 계속해서 같은 일을 하는 것이 때론 지겹고 고되기도 하지만 자신이 꽃장수가 아니라 빵장수인 게 좋다고 그는 말한다. 사람들이 먹는 것을 만드는 일, 빵 냄새는 언제라도 꽃 냄새보다 좋다고.
앤은 롤빵을 세 개나 더 먹고, 온갖 빵을 더 먹을 수 없을 때까지 먹고도 자리를 뜨지 않는다. 새벽이 오고 햇살이 높이 비칠 때까지 그들은 이야기를 나눈다. 책은 여기서 멈춘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그 아침 새벽, 해가 비치는 창가의 풍경을 그리며. 앤의 부부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내일을 살아가게 될지 작가는 어떤 한 말도 덧붙이지 않는다.
아무 일 없을 것 같은 인생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운 때에 더 이상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잠도 자지 못할 것 같은 때에, 우리의 찬란했던 인생이 이제 막을 내리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 것 같은 때에, 누구에게 인지 어디로 인지 모르는 화가 머리 끝까지 뻗쳐 오를 때에, 앤의 부부는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알지도 못하는 한 사람을 만나고 그에게 따뜻한 빵을 대접받는다. 그가 구워준 빵, 그리고 내려준 커피가 이상하게도 목구멍에 구역 구역 잘도 넘어간다.
접점이 없는 그의 인생 이야기에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고 그 자리를 오래도록 떠나고 싶지 않아 진다. 우리는 그 순간, 낯선 듯 익숙한 그에게 온전히 의지하고 있다. 그가 이웃이나 친구, 가족이 아닌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로 인간이 인간에게, 번뇌와 고단함이 번뇌와 고단함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 낯선 이와 나 사이를 오가며 말하지 않아도 입으로 온기로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인생이라는 무게. 그 순간 나와 나를 둘러싼 불행한 진실을 온전히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을, 앤 부부는 처음 느끼고 배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들의 삶은 다시 이어질 거라고 헤아려 본다.
소설가 박완서가 이 줄거리를 길고 장황하게 서술한 것은 그에게도 아들을 잃은 참척의 고통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말과 글, 감정과 진실을 다루는 그에게도 감히 그 상심은 꺼내어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무려 이 십 년의 세월이 흘러, 멀고 먼 서양 작가가 쓴 글에 묻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삶이란 존엄한 건지, 치사한 건지 이 나이에도 잘 모르겠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그 빵과 빵장수 같은 존재를 살면서 마주칠 때가 있다. 그때에는 비록 깨닫지 못하지만, 그와 나눈 한 잔의 커피 한 끼의 밥이 삶을 이어지게 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는 것을 어쩌면 우리는 수년 수 십 년이 흐른 후에 알아챌지 모른다. 누군가와 나누는 일상의 밥 한 끼, 커피 한 잔의 여유를 거절하지 않을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