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은 모두 주인공의 몫으로... 그저 격렬히 울고 웃으며 사시길"
요즘 말로 '아싸'의 기질이 다분한 나는 유행하는 것들에 한참 뒤처져 있다. 그래서 이른바 입소문을 타고 웰메이드 드라마로 인정받은 작품들도 몇 주, 몇 달, 심지어 몇 해가 지나 VOD로 몰아본다. 세상이 좋아져서, 검색하면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한때 주변에서 강추하던 드라마가 있었다. 검사들의 세계를 내밀하게 잘 그렸다는 <비밀의 숲>. 스폰 검사와 권력에 줄대는 검경들. 선악의 구분과 정의의 집행자가 불분명해진 세계.
주인공 황시목 검사역을 맡은 배우 조승우가 진심 멋지다고 시집을 안간, 골드미스 절친 눈에 하트가 뿅뿅하던 것이 생각난다. 고리타분하고 권력지향적인 먹물이라며 소개팅도 저어하던 그 직업군에서 반할 만한 주인공. 대놓고 왕따에 혼밥이 일상인 그야말로 '아싸'. 의학적 원인으로 감정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감정불능자인 그를 주인공으로 어떻게 이야기가 전개될까.
결과적으로 나는 이 드라마에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에 적잖은 애정을 느끼게 됐다. 심지어 범인이라는 사람까지도. 이것이 바로 작가의 필력이라는 것일까.
작가는 인물 하나하나 입체적이고 다면적으로 그려낸다. 인간을 보는 눈이 깊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일 거라 짐작된다. 사회를 보는 눈,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시스템에 대해서는 다소 서늘하고 냉소적이다. 무엇보다 큰 장점은 직업세계의 디테일을 살리면서, 그 안에 몸담은 직군들의 한계와 고민점을 각 인물을 통해 잘 짚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 드라마에서 무엇보다 주목해서 봐야 할 이는 주인공 황시목이다. 그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하는 생각이 이 작품의 기획의도이며 주제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1. 황시목은 감정이 거의 없다. 그리고 이런 인간형을 주인공으로 세운 이유를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감정이 없다는 것은 인간으로선 커다란 결격 사유다. 그럼에도 주인공이 감정 결여인 것은, 요즘 세상에 감정은 너무 쉽게 욕심과 갈등으로 둔갑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감정엔 온정, 배려, 공감 등등 긍정적인 것이 참 많은데, 어째서 부정적인 것들의 기운이 훨씬 더 세져버린 느낌일까. 가장 정의로워야 할 주인공이 감정이 없다는 건 아이러니다. 아이러니이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옳은 길과 쉬운 길 중에 가시밭이 예상되는 옳은 길로 뚜벅뚜벅 나아가는 사람을 보여드릴 수 있기를 바란다.
아무도 대놓고 나쁜 길을 선택하진 않는다. 다만 옳은 길이 너무 어려워 보이고 너무 험해 보이니까 그 옆의 쉬운 길로 한 발 살짝 빼게 되는 것이다. 시작은 비슷했더라도 그 길의 끝은 완전히 다른 갈래로, 아주 멀리 갈라져 있을 것이다. 첫 발에서 많이 하는 실수, 그 실수에서 처음부터 배제된 사람이 필요했다. 흐르는 대로 살다 보니 어느새 자기도 모르는 곳에 닿아버리고는 나도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 대신, 생각하고 행동하는, 책임지는 사람이."
<비밀의 숲> 대본집 기획의도 중에서
2. 드라마를 닫은 후에도 오래 마음에 남는 이도 역시, 황시목이다. 그의 쓸쓸하고 구부정한 어깨와 불꺼진 집과 잃어버린 사람에 대한 잔상이 쉽사리 지워지질 않는다. 작가는 이런 시청자의 심정을 예상했다는듯 이런 글도 남겼다.
"감정 없이 혼자 흘러와야 했던 주인공의 시간에 아파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아픔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사시길, 삶의 고달픔과 인간관계의 중압감에 나도 차라리 아무것도 못 느꼈으면, 한숨짓는 분이 없길 바랍니다. 그런 것은 모두 주인공의 몫으로 남겨두고 모두 격렬히 울고 웃으며 사시길."
<비밀의 숲> 대본집 작가의 말 중에서
작가는 드라마 곳곳에 캐릭터 하나하나를 보듬고 토닥이는 대사와 상황을 만들어주었지만, 결정적으로 대본집을 읽는 독자들의 가슴 안에 일렁이는 애잔함까지 살핀다.
개인적으로는 이 드라마에서 '다크나이트(Dark Knight)'로도 불리는 이창준 차장검사를 보고, 어디서 본 그 누군가를 떠올렸다. 실제로도 그 직군에서 그만큼이나 승진을 하고 그만큼이나 내부세계에 깊이 관여하며 은퇴를 했을 어느 고위 검찰 간부.
그의 생각과 성격, 말투, 행동패턴이 흡사해서, 마치 이 드라마가 그를 모델로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그러나 어디까지나 드라마는 드라마일뿐, 더욱 강렬하게 극적으로 퇴장한 캐릭터들과 꼭 같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직업은 생업인 동시에 한 인간의 정체성이며 동시에 대체로 삶의 총체이기도 하다. 옳은 길과 쉬운 길 중 옳은 길을 택한, 몇 안되는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의 고집과 미련스러움이 이 사회에 밀알이 되길. 설령 그것이 그만이 아는 진실로 땅속 깊이 묻혀 있을 지라도.
그리고 부디, 억울하고 서러워 외로운 이들은 그 슬픔을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는 주인공의 몫으로 남겨두고 서로서로 손잡고 울고 웃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