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책 좋아하세요? 어떤 책을 주로 읽으시나요?
2021년, 현실 대화가 이렇게 나른하게 흘러가는 경우도 거의 없을 테지만 내게 책은 지극히 (신성하고) 개인 취향의 영역이라서 굳이 물었던 적도 없는 것 같다. 여하튼 자문자답해보자면 나는 주로 소설이나 에세이를, 특히 모국어가 주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 한국 작품들을 꾸준히 읽어왔다.
예전에는 닥치는 대로 많이 읽고 샀다면 요즈음은 주로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소장할 책들은 무척 신중하게 고른다는 점만 달라진 것 같다. 결국 내 곁에 끝까지 남아 몇 번이고 읽어도 좋을 책들은 정돈된 사고와 언어들이 담긴 것들이다. (이를 신형철 작가님은 소설이 가져야 할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기능성과 (언어로 만드는 예술품이라는) 예술성이라고 정리해주셨다.) 흔히 말하는 소장각.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합격점이다.
솔직히 말하면 평론가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입이 조금 비뚤어진 심술쟁이들 같았다. 스스로는 창조하지도 못하면서 끊임없이 앉아 나오는 디쉬에 대해 불평을 해대는 사람들.
생각이 달라진 건 황현산 선생님의 <밤이 선생이다>를 접하면서였다. 평론가에 대한 나의 편견 때문에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고 나서야 뒤늦게 읽었다는 게 아쉽지만 그분이 남긴 글들은 영원하다는 데서 위안을 찾는다. 스마트 도서관에 책 반납을 갔다 제목만 보고 아무 정보 없이 이 책을 빌렸는데 읽는 내내 리틀 황현산이군 생각했다. 탄탄한 그의 글들을 천천히 읽고 마음에 드는 부분들은 필사하다 기어이 반납일을 놓치고야 말 정도로.
이 책은 신형철 작가님이 8년간 여러 매체에 실었던 글들을 모은 것이다. 개인과 사회, 문학과 예술 전반에 대해 오래 고민하여 다듬은 생각들을 정확한 문장들에 묻혀낸 책이다. 그가 책머리에서 집짓기에 비유하여 글짓기에 대해 밝히듯 '인식을 생산했고', 그에 맞는 '정확한 문장을 쓰는 것이 아니라 찾아냈으며', 단락과 내용의 배분이 적절하여 '시각적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생각의 구조적 균형'을 이뤘다. 문예창작과 교수님 글답게 잘 쓴 글의 표본 즈음.
특히 책을 읽으며 어떤 단어들은 사실 내 머릿속에서 분류 조차 제대로 되지 못한 흐릿한 관념이었구나를 깨달았다. 예를 들면, 사고와 사건에 대해 작가님은 아래와 같이 말한다.
사고와 사건은 다르다. 예컨대 개가 사람을 무는 것이 사고이고 사람이 개를 무는 것이 사건이다.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사고는 ‘처리’하는 것이고 사건은 ‘해석’하는 것이다. ‘어떤 개가 어떤 날 어떤 사람을 물었다’라는 평서문에서 끝나는 게 처리고, ‘그는 도대체 왜 개를 물어야만 했을까?’라는 의문문으로부터 비로소 시작되는 게 해석이다. 요컨대 사고에서는 사실의 확인이, 사건에서는 진실의 추출이 관건이다. 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 사고가 일어나면 최선을 다해 되돌려야 하거니와 이를 ‘복구’라 한다. 그러나 사건에서는, 그것이 진정한 사건이라면, 진실의 압력 때문에 그 사건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된다. 무리하게 되돌릴 경우 그것은 ‘퇴행’이 되고 만다.
또 이 책은 왜 소설을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도 주었다. 내가 인문학적인 소양이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만 책이 없는 삶은 생각할 수 없다. 난 주로 천천히 오래 혼자 책을(특히 소설을) 읽어왔다. 언젠가 다독가로 알려져 있던 상대가 나는 소설은 읽지 않아 라고 단호하게 말해서 무척 당황한 적이 있었다. 책을 즐겨 읽는 사람들 중에도 소설을 읽지 않는 사람이 많다는 걸 난 그때까지 잘 몰랐다. 더 바보 같았던 건 넌 왜 소설을 읽어라는 질문에 어물쩡거리며 답을 잘 못하고 넘어갔다는 것이다. 내겐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당연한 것이라. 그 후로 그녀와 멀어졌지만, 우리가 다시 만날 일이 있다면 그땐 아래 글을 꼭 인용해주리라.
그런 소설을 좋아한다. 해석되지 않는 뒷모습을 품고 있는 소설, 인생의 얼굴에 스치는 표정들 중 하나를 고요하게 보여주는 소설. 한 사람의 표정들을 모두 모은다고 그 사람의 얼굴이 되지는 않는다. 한 소설이 건드리는 ‘작은 진실’은 독자적인 것이고, 과학이나 철학이 제시하는 ‘큰 진실’(진리)의 한낱 부분들이 아닐 것이다. 전체로 환원될 수 없는 부분들, 그런 것들의 세계이니까, 소설이란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 소설을 읽으면 겸손해지고 또 쓸쓸해진다. 삶의 진실이라는 게 이렇게 미세한 것이구나 싶어 겸손해지고, 내가 아는 건 그 진실의 극히 일부일 뿐이구나 싶어 또 쓸쓸해지는 것이다.
(...)
‘삶의 시작과 종말에 대한 무언가 중요한 생각’이라는 문구에서 ‘시작’과 ‘종말’이라는 말을 폭넓게 받아들이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그것은 일단은 출생과 죽음이겠지만, 더 나아가 기쁨과 슬픔, 소유와 상실, 에로스와 타나토스, 만남과 이별 등등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이런 것들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데 정작 그런 것들을 가장 잘 모른다. 그러니 소설을 읽는 것이다. ‘무언가 중요한 생각’을 곧 만나게 되리라 기대하면서.
(...)
즉, ‘진정한 삶’을 사유한다는 것은 곧 ‘삶의 의미’를 사유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삶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더 줄이면 이렇다. ‘왜 사는가?’ 요즘 인기 있는 질문은 아니다. 의미가 아니라 효율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효율을 위한 ‘노하우(know-how)’이지 의미에 관여하는 ‘노와이(know-why)’가 아니다.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 대목에서 장렬히 실패하기 위해서다. 자기 계발서가 ‘노하우’를 알려줄 때 인문학 서적은 ‘노와이’를 알려주지 못한다. 인문학은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질문에는 원래 답이 없다..
이 책은 어쩌면 몸과 마음이 모두 바쁜 사람에겐 읽기 쉬운 책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짧은 글들의 모음이니 필요하거나 와닿는 부분만 그때 그때 나눠 읽어도 될 것이라 생각한다.) 아마 글이 지나치게 관념적이거나 늘어진다 싶은 때도 있을 것이다. (인문학이란 원래 질문이며 답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우리 삶도 그러하듯이.) 때론 당신과 다른 정치색이 드러나 불편해질 수도 있다. (참고로 이 글은 2018년 출간되었다.) 하지만 글도 말만큼이나 빠르게 쏟아지는 시대에 나는 다소 묵직한 느낌을 주는 이런 글들을 읽는 게 즐겁다. 읽는다고 당장 변화가 있는 건 아니지만 읽고 나면 어쩐지 내가 조금은 성장한 것 같다. 약간은 나은 사람이 된 것 같다.
소설과 비평가의 책들이 잊히지 않고 더 많이 읽히기를,
그리하여 우리가 조금 겸손해지고 쓸쓸해질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