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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gainJ Jan 11. 2022

결과가 아닌 태도로 말하는 인생

존 윌리엄스 <스토너>

어느 때보다 하릴없이 게으르게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았다. 지난 2 주 동안은 브런치도, 습관처럼 들락날락거렸던 인스타그램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저 각자의 방학과 휴가를 누리는 아이와 남편 옆에서 코로나 시대의 필수품이라는 꼬임에 넘어가 얼떨결에 들인 75인치 텔레비전의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뒤늦게 스우파를 섭렵하고 디즈니 플러스 영화들을 보며 흘려보냈다.


사실 지난해 마무리로 받은 건강 검진이 끝이 아니라 병원 투어로 다시 시작되는 분위기였고 새 해 첫 주부터 조직 검사도 했으니 결과가 나올 때까지 무언가를 힘차게 시작할 기분이 아니기도 했고.


팽팽한 긴장감에 사로잡히다가도 묘하게 늘어지는 시간 동안 위로가 된 건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였다. 연말과 연초에 읽을 책은 특히나 신중하게 고르는 편이다. 한 해 동안 읽어 보고 싶었으나 남겨둔 책 리스트 중 고르고 골라 그 해 마지막 책과 다음 해 첫 책을 고르곤 한다. 마지막과 첫 기억은 유난히 강렬한 법이니까.


<스토너>는 여러 사람에게 진작부터 추천을 받았는데 약간의 청개구리 심보가 있는 나로서는 재작년 한참 이야기를 들었을 땐 어쩐지 내키지 않았다. 아마도 이렇게 올해 첫 책으로 만나기 위해서였나 보다. 오래 곁에 두고 꺼내 읽을 나의 최애 책 중 한 권이 될 운명으로 말이다.


나는 왜 스토너란 다소 밋밋한 캐릭터를 사랑하게 되었나.


스토너는 살아 있을 때나 사후에도 성공하거나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야기는 이렇게 스토너를 소개하며 시작한다.



스토너의 동료들은 그가 살아 있을 때도 그를 특별히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의 이름을 잘 입에 올리지 않는다. 노장교수들에게 스토너의 이름은 그들을 기다리는 종말을 일깨워 주는 역할을 하고, 젊은 교수들에게는 과거에 대해 아무것도 일깨워 주지 않고 동질감을 느낄 구석도 전혀 없는 단순한 이름에 불과할 뿐이다.



스토너의 삶을 따라가며 가장 먼저 느낀 건 동질감이었다. 중년이란 막연했던 단어가 연례행사처럼 일 년에 한 두 차례 즈음 조직 검사를 하게 되는 당장의 신체 변화로 실체를 띈 채 성큼 다가오니 생각은 한 발 더 빠르게 먼 훗날 내가 사라지면 나는 어떻게 기억될까까지 날아간다.


아마도 스토너의 저 평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심지어 난 직장 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니 평가를 떠나 나를 기억하는 이는 극히 손에 꼽겠거니 생각하면 절로 지나온 삶이 쓸쓸해진다. 아마도 살면서 누군가에게 대단한 원한을 산 일도 적었겠지만 그만큼 삶의 밑바닥을 보여줄 만큼 가까이 만난 사람도 적었을 것이다. 이런 내 삶도 과연 의미가 있을까 싶을 때 스토너의 평범한 듯 단단한 삶을 따라가다 보니 묘하게도 하찮은 내 인생까지 괜찮아진 기분이었다.


그는 책임감으로 인생을 버티듯 사는 사람이었다. 고된 노동을 정직하게 온 몸으로 체득하며 평생을 살다 끝내 그 땅의 일부가 되어 버린 농부의 자식답게 자연스럽게 습득한 성실함으로 그의 삶에 닥쳐온 위협들(그를 평생 쥐고 흔드는 아내 이디스나 그 대신 학과장의 자리에 올라 학교에서 사사건건 그를 가로막는 동료 교수 로맥스)을 불평하거나 투쟁하지 않고 버틴다. 생의 마지막까지 단 한 번의 반전도 일으키지 않은 채.


말 그대도 숨을 거두기 전까지 놓지 않았던 문학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사랑을 제외하면 그는 모든 것에 서툰 사람이기도 했다. 그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들(딸 그레이스나 그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캐서린 같은 존재부터 공간이 곧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서재까지)이 하나 둘 사라질 때도 그는 관조적인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자신의 선택(학문이든 사람이든)에 대한 믿음이 있고 그 신념은 굽히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로맥스나 그의 애제자인 찰스 워커의 허장성세를 견디지 못한다. 본질 없이 한 편의 훌륭한 공연과도 같은 그들의 매력적인 궤변을 그는 참지 못한다. 그리고 뻔히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를 알면서도 찰스 워커를 그대로 졸업시켜 강단에 서게 할 수는 없다는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는다.


나는 그런 스토너가 "찐"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자신의 인생을 문학에 바쳤음에도 결과적으로는 그토록 사랑했던 문학사에 어떠한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해도 그의 삶과 노력은 여전히 유효하다.


결국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라 태도였다.


문학을 향한 스토너의 마음은 진심이었고 살아 있는 동안 그 마음을 잃지 않았다. 성실한 일상을 쌓아 올리면서 자신의 선택을 지켜 나갔다. 그 안에서 만나는 성공과 좌절은 등락을 반복했지만 크게 일희일비하지 않고 계속해나가는 그의 담담함이 나는 좋았다. 스토너가 완전하거나 대단한 인물이 아니라 여러모로 분명 부족하거나 불운한 면이 있고 결과적으로 흐릿하게 남은 평범한 존재라 해도 지난한 삶 가운데에서도 멈추지 않고 계속 살아가려 애쓰는 그의 태도는 감동적인 데가 있었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내 삶의 마지막에 나도 스토너와 같은 질문을 할 것 같다.


결국 대단한 업적을 남기지 못한다 해도 하루하루 "찐" 삶을 살다 보면 부정할 수 없는 나의 일부가 어딘가에는 분명 희미하게 남으리. 그리고 그런 삶이라면 충분히 위대해질 수 있을지도, 스토너의 것처럼.



그는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남들 눈에 틀림없이 실패작으로 보일 자신의 삶을 관조했다. 그는 우정을 원했다. 자신을 인류의 일원으로 붙잡아줄 친밀한 우정. 그에게는 두 친구가 있었지만 한 명은 그 존재가 알려지기도 전에 무의미한 죽음을 맞았고, 다른 한 명은 이제 저 멀리 산 자들의 세상으로 물러나서...... 그는 혼자 있기를 원하면서도 결혼을 통해 다른 사람과 연결된 열정을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그 열정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열정이 죽어버렸다. 그는 사랑을 원했으며, 실제로 사랑을 했다. 하지만 그 사랑을 포기하고, 가능성이라는 혼돈 속으로 보내버렸다. 캐서린.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캐서린."


그는 또한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지만, 거의 평생 동안 무심한 교사였음을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언제나 알고 있었다. 그는 온전한 순수성, 성실성을 꿈꿨다. 하지만 타협하는 방법을 찾아냈으며, 몰려드는 시시한 일들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는 지혜를 생각했지만, 오랜 세월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무지였다.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그는 생각했다. 또 뭐가 있지?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중략)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기쁨 같은 것이 몰려왔다. 여름의 산들바람에 실려온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실패에 대해 생각했던 것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런 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고. 이제는 그런 생각이 하잘것없어 보였다. 그의 인생과 비교하면 가치 없는 생각이었다.


(중략)


이 책이 망각 속에 묻혔다는 사실,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는 사실은 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이 책의 가치에 대한 의문은 거의 하찮게 보였다. 흐릿하게 바랜 그 활자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게 될 것이라는 환상은 없었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그의 작은 일부가 정말로 그 안에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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