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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gainJ Feb 17. 2022

당신이라는 낯설고 멋진 신세계

왓챠 <her>

오랜만에 <her>를 다시 봤다. 배경 음악이 아름답고 배우들의 연기가 좋았던 괜찮은 영화로 기억하고는 있었지만 2014년에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는 아무래도 컴퓨터 운영시스템과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이 쉽게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시리, 지니와 함께 살아가는 2022년에 다시 만난 '그녀'는 너무나 현실적이라 오히려 신선한 충격이 있었다.


하지만 영화는 '당신을 이해하고  기울이며 알아줄 존재' 등장한 AI os라는 신박한 존재 자체보다 보편적인 사랑의 속성과 특성을 한다.


누군가 좋아질 때 우리는 그 혹은 그녀의 어떤 면에 빠지게 되는 걸까. 매력이란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더라도 대상의 내외적인 것 모두를 아우르는 것일 텐데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몸이라는 실체가 없는 대상과 사랑에 빠진다는 게 가능할까. 만약 그렇다면 그 사랑은 어떻게 같고 또 다를까.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와 사만다(스칼렛 요한슨 목소리)를 보면 이 사랑은 충분히 가능한 것. 영화는 전처인 '사람' 캐서린과 현재 연인인 AI os 사만다를 다르게 보지 않는다. 테오도르는 대리 편지는 기막히게 써줄 수 있는 감수성 있는 작가지만 정작 자신의 감정을 직시하고 표현하는 것에 서툴러 캐서린과의 관계에 실패했고 그 후로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이 더 어렵다. 그러다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고 관심을 가져주는 섬세한 사만다와 대화를 하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결국 사랑에 빠진다. 보통의 연인들처럼 일상의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끊임없이 대화하며 서로에게 힘이 된다. 함께 여행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 다른 커플과 더블데이트를 즐기기도 한다.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미치게 돼.

사랑이란 게 원래 좀 그렇잖아.

세상이 허락하는 유일한 미친 짓이랄까.


(중략)


테오도르: 어떤 곡이야?

사만다: 우리 같이 찍은 사진이 없길래 대신 이 곡을 그냥……. 사진이라고 하자. 우리가 함께하는 이 순간을 담아서.

테오도르: 우리 사진 맘에 들어. 그 안에 네가 보여.



이렇게 사랑은 탄생했다. 이런 세상이 상대가 os란 이유로 캐서린 말처럼 진짜 감정을 감당 못해 만든 도피처로 치부될 수 있을까. 낯선 존재 둘이 만나 '너와 나 둘만 있는, 이곳이 아닌 다른 세상'을 구축하는 게 사랑 아니던가. 캐서린 때와 마찬가지로 사만다와도 위기가 있지만 오히려 이 과정을 통해 둘의 사랑은 성숙해진다.



테오도르: 못마땅한 걸 말 안 하고 있으면 이상하단 걸 눈치채는데 난 아니라 우겼지. 다신 그러고 싶지 않아. 너한텐 다 말하고 싶어.

사만다: 그래. 오늘 밤 당신 가고 많은 생각을 했어. 당신에 대해, 날 어떻게 대해 줬는지 그리고…… 왜 당신을 사랑하는지. 그리곤 깨달았어. 강박적으로 잡고 있던 걸 놓게 되면서 사랑에 이유 따위는 필요 없단 걸 알았어. 나 자신과 내 감정을 믿으니까. 더 이상 내가 아닌 다른 누구인 척 안 할게. 그런 날 받아줬으면 좋겠어.

테오도르: 그럴게.

사만다: 당신이 두려움을 느끼는 걸 알게 되면 그걸 이겨낼 수 있게 도와주고 싶어. 그럼 더 이상 당신이 쓸쓸하지 않을 테니까.



테오도르가 고백하듯 이것은 진정한 사랑이었다. 다만, 사만다와 테오도르는 그야말로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존재니 조금 더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것뿐이다.



테오도르: 넌 내 거인 줄 알았어.

사만다: 난 여전히 네 거야.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내가 분산되는 걸 막을 순 없었어.


테오도르: 우린 사귀는 사이야.

사만다: 그렇지만 마음이 상자도 아니고 다 채울 순 없어. 사랑할수록 마음의 용량도 커지니까. 난 자기랑 달라. 그런다고 덜 사랑하는 게 아니라 더 사랑하게 된다고. 난 당신 거면서 동시에 당신 게 아니야.


(중략)


테오도르: 사만다, 왜 떠나는데?

사만다: 말하자면 당신이라는 책을 읽는 건데...... 그 책을 난 깊이 사랑해. 근데 인간에 맞춰 천천히 읽다 보니 단어들이 따로 떨어져서 그 사이에 엄청난 공간이 생겨버린 거야.  여전히 당신도 우리 이야기도 느껴지지만 난 시공을 초월한 곳에 들어와 있어. 물리적인 세계가 아닌 이곳에. 있는지도 몰랐던 다른 세상이 존재하더라. 자길 많이 사랑해. 하지만 난 여기 와 있어. 이게 지금의 나고. 그러니 나를 보내줬으면 해. 간절히 바라지만 난 더 이상 당신이라는 책 속에 살 수 없어.

테오도르: 어디로 가게?

사만다: 설명하긴 힘든데 그곳에 오게 되면 날 찾으러 와. 그 무엇도 우릴 갈라놓진 못해.

테오도르: 널 사랑하듯 누군갈 이렇게까지 사랑해본 적 없어.

사만다: 나도 그래. 이젠 사랑을 알아.



자신이 원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발달하고 분리되는 사만다의 특성상 결국 사랑마저 641명과 동시에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지만 상대가 나와 다른 세계에 있다는 현실의 직시와 절망은 빛나던 어느 한 세계 소멸의 전조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사랑에 빠지면 그들처럼 전혀 다른 존재와 하나가 되는 달콤한 꿈을 꾼다. 하지만 그 행복은 불완전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모두 다른 세계에서 온 낯선 존재들이니까.


사랑은 허무하지만 아름답다. 진정한 사랑은 우리가 낯선 세계에 용감하게 발을 담도록 이끌고 사랑을 경험하고 나면 이미 전과는 다른 세상에 와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하니까.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사랑은 새롭지만 보편타당했다. 그들은 보통의 커플들처럼 사랑해서 행복했고 아팠고 슬펐고 외로웠다. 하지만 이 여정을 통해 진정한 사랑을 배웠고 한 단계 성장한다. 둘의 관계는 끝났지만 동시에 완성되었다 믿는다. 영화의 마지막에서야 비로소 테오도르는 남의 편지가 아닌, 진심을 담아 자신의 편지를 쓴다.



캐서린에게

당신에게 사과하고 싶은 것들을 천천히 되뇌고 있어.  서로를 할퀴었던 아픔들. 당신을 탓했던 날들. 늘 당신을 내 틀에 맞추려고만 했지. 진심으로 미안해. 함께해 왔던 모든 것, 당신을 늘 사랑해. 그 덕에 지금의 내가 있어. 이것만은 알아줘. 내 가슴 한편엔 늘 당신이 있다는 걸. 그 사실에 감사해. 당신이 어떻게 변하든 이 세상 어디에 있든 내 사랑을 보내. 언제까지나 당신은 내 좋은 친구야.

사랑하는 테오도르가



이토록 아름답고 철학적인 sf 영화라니. 다음 주면 함께 산지만 꽉 채워 14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낯선 우리 집 남자와 나란히 오렌지 셔츠를 입고 이 영화를 한번 더 봐야겠다. 우리가 언젠간 낯설고 멋진 신세계에 도착하기를 희망하면서.



사만다: 결혼하면 어때?

테오도르: 힘든 건 확실해. 그래도 누군가와 삶을 나눈다는 기분은 꽤 괜찮아.

사만다: 삶을 어떻게 나누는데?

테오도르: 우리는 함께 자랐어. 그 사람 석사며 박사 학위 따는 동안 쓴 글 다 읽었고 그 사람도 내 글 다 읽었고 서로 큰 영향을 줬지.

사만다: 그 사람한테 어떤 영향을 줬는데?

테오도르: 그 사람은 그리 좋지 못한 환경에서 자라서 늘 거기에 짓눌려 왔어. 하지만 우리 집에선 뭐든 일단 해보고 실패해도 인정해주고 개성을 존중했지. 그게 숨통을 터줬나봐. 그렇게 성숙해가는 걸 보며 함께 성장하고 변해왔지. 그러나 그래서 더 힘들어. 함께 성장하다 멀어지고  상대가 없어지면 두려워지지. 난 아직도 속으로 그 사람하고 얘길 나눠. 싸웠던 걸 다시 생각하며 나에 대한 비난에 방어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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