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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gainJ Nov 30. 2021

장래 희망은 판타스틱 여사님

왓챠 <캡틴 판타스틱>

육아와 자녀 교육은 친숙하면서도 동시에 좀 껄끄럽고 피하고 싶은 주제다. 한 때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포기한 건 무척 좋아하는 작가들조차 그들의 육아서가 다른 책들에 비해 다소 실망스러웠던 경험 때문이었다.


부모 자식 이야기는 얼핏 보편적인 것 같지만 사실 지극히 사적인 영역인 데다 기본적으로 편파적일 수밖에 없는 대상에 대해 타인의 공감을 얻는 글을 쓰기란 쉽지 않다. 종종 육아서를 읽으면 의도치 않게 타인의 러브레터를 훔쳐 읽은 것처럼 화끈거리곤 한다.


특히 자녀 교육은 겉으로 드러나는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능력부터 쉽게 드러나지 않는 집안 분위기나 가치관까지 부모 개인의 많은 부분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민감한 영역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남다른 교육열을 들지 않더라도 자녀를 대하는 부모의 교육관과 태도를 통해 그 혹은 그녀의 민낯을 마주하게 된다.


그래선지 육아나 교육에 관해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을 도리어 경계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말과 실제가 다르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니 차라리 드러내 놓고 속물근성을 보이는 사람들보다 가식적이거나 구제불능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사실 이상적인 교육에 관한 이야기다. 아빠 벤은 자녀들을 플라톤이 말한 철학자 왕(philosopher king)으로 키우리란 희망을 갖고 깊은 숲 속에 기존 제도나 권력에서 벗어난 그들만의 '이상 국가'를 만든다.


이들은 매일 체력 단련, 암벽 등반, 접골법, 화상 치료법, 식용 식물 구분법, 가죽으로 옷 만드는 법, 별을 보며 길 찾는 법, 칼 하나로 생존하는 법 등을 익힌다. 밤이면 다 같이 둘러앉아 각자의 진도대로 책(이때 초등 정도 되는 아이들이 읽는 책이 <총, 균, 쇠>, <미들 마치>, <우주의 구조> 같은 것들이다.)을 읽고 아빠는 한 명씩 읽은 부분을 체크해주고 계속 질문하고 토론한다. 그러다 아빠가 기타를 시작하면 큰 아들 보가 곧 조심스레 반주를 더하고 넷째 렐리안이 다른 리듬을 만들면 조금씩 각자의 악기로 그 리듬에 또 다른 음과 리듬을 얹다 끝내 신난 아이들이 일어나 춤추며 곡을 완성한다.


본인들의 세계에 살던 이들이 엄마의 죽음과 장례식 때문에 캐빈 쿨리지가 말한 '시민들 대부분이 광란의 쇼핑을 통해 사회적 상호관계를 맺는', 막내 나이의 말처럼 ‘모두가 어디 아픈지 싶을 정도로 뚱뚱한’ 세상으로 나오게 되면서 갈등이 본격화된다.


6개 국어를 할 정도로 남다른 지성과 강인한 체력을 갖췄지만 정작 평범한 또래와의 만남이나 연애엔 잼병인 큰 아들은 자신이 그저 괴짜로 자란 건 아닌지 고민하게 되고, 대학 진학 문제로 아빠와 부딪힌다.


자본주의 소비문화를 경멸하며 온 가족이 슈퍼에서 물건을 훔친다던가, 아이들에게 엄마의 자살을 가감 없이 설명하는 벤의 교육 방식은 기존 사회에선 너무나 급진적으로 보인다. 사위 때문에 딸을 잃었다 여기는 장인어른이나 또래 아이들을 키우는 고모가 보기엔 벤의 아이들은 실제 학교와 사회라는 울타리가 필요한 비현실적이고 위험한 상태일 뿐이다.


완벽해 보였던 벤 가족도 기존 사회에 들어왔을 때 문제가 드러나고 위기도 겪지만 결국 아이들은 아빠를 믿고 지지했다. 그들은 본인들의 방식으로 엄마와 헤어진다. 묻힌 엄마의 시신을 찾아 유언대로 화장을 해주고 노래를 부르며 유골을 비행기 변기에 뿌려주면서.


한 생명을 키우다 보면 자연스럽게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자주 하게 되는 것 같다. 잘 산다는 것,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 아이에게 주고 싶은 가치 같은 것들에 대해. 그리고 그것보다 조금 더 자주, 머리로 생각한 것과 현실의 내가 얼마나 다른지 스스로 한계를 깨달아 좌절하기도 하고.


그런 의미에서 벤 가족이 몹시 부러웠다. 그들은 특이했지만 특별했다. 비현실적일 정도로 이상적이었지만 거부감 없이 아름답게 받아들여진 건 이 영화에 여러 차례 나오는 (그들이 너무 존경하여 크리스마스 대신 그의 생일을 기념하는) 노엄 촘스키의 말처럼 인간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규정되는 것이고 벤 가족들은 그 말과 행동이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저런 교육을 꿈꾼 적이 있었다. 스스로 생각하고 느낀 것을 배우고 실천해가는 삶. 하지만 난 행동하지 못했고 가져보지 못한 것.


영화의 마지막에 가족들은 새로운 선택을 한다. 큰 아들은 대학 대신 여행을 떠나고 남은 동생들은 전처럼 직접 키운 유기농 음식들을 먹고 아침 식사 시간 진지한 독서를 이어 나가지만 학교 교육을 받는 것으로.


소신이 뚜렷한 아빠 벤도 흔들리지 않았던 게 아니었다. 다만 흔들리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끊임없이 의논하고 고민하면서 행동하는 부모였을 뿐이다. 나 역시 생각이 생각에서 그치지 않도록, 실패하더라고 행동하는 벤 같은 부모이고 싶다.



(롤리타를 읽으며 혼란스러워하는 아이에게)

아빠 벤: 흥미롭다처럼 무의미한 말은 쓰지 마. 명확하게 표현해.

딸 키엘러: 그냥 읽으면 안 돼?

아빠 벤: 지금까지 읽은 걸 분석한 다음에


(중략)


(노엄 촘스키의 생일 대신 우리도 평범하게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면 안 되냐는 아들에게)

아빠 벤: 토론해보자.

아들 렐리안: 됐어.

아빠 벤: 아냐, 설명해. 네 주장을 관철시켜봐. 우린 들을 준비가 돼있어. 타당하고 설득력 있다면 우리 생각도 바뀔 거야.



무엇보다 질문으로 대화의 문을 여는 사람,

답이 미숙해도 진지하게 응해주는 능동적인 청자,

아이를 대등한 인격으로 존중하는 부모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판타스틱 여사가 되는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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