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gainJ Oct 01. 2021

우리가 감히 예술과 기적을 말할 때

왓챠 <서칭 포 슈가맨>

이 다큐멘터리는 언젠가 라디오에서 추천하는 걸 듣고 보고 싶은 영화 리스트에 담아뒀었다. 그때 내용은 전부 흘려듣고 단지 제목이 한국 프로그램과 비슷해 기억에 남았을 뿐이라 처음엔 당연히 한국 영화인 줄 알았다.(영화 포스터의 선글라스를 낀 로드리게스의 모습이 얼핏 그룹 부활 느낌의 한국 가수 같기도.) 알고 보니 앞뒤가 바뀐 것이었다. 우리나라 방송이 이 다큐멘터리에서 슈가맨이라는 제목을 따온 것이라고.  


60년대 황폐한 미국 디트로이트 뒷골목 술집에서 관객을 등지고 앉아 본인 노래를 부르던 로드리게스를 발견한 프로듀서들은 곧바로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자신있게 두 장의 앨범을 내지만 처참하게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그와 그의 노래들은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완전히 망한 앨범'은 뜻밖에도 머나먼 지구 반대편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70~80년대 남아프리카 공화국, 그의 음악은 반체제 음악으로 젊은이들에게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그들의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변화시켰다. 그곳에서 로드리게스는 비틀스였고 엘비스 프레슬리보다 유명한 영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 가수의 음반과 공연이 금지된 사회 분위기며 그에 대해 알려진 바라고는 미국에서조차 전혀 없었으니 어느 순간부터 그는 공연 중 분신자살을 했다거나 약물 중독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다 90년대 후반, 어느 음악 평론가가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3년이 넘도록 행적을 조사한 끝에 여전히 디트로이트에서 매일을 성실히 일용직 노동자로 살아가는 '살아있는' 로드리게스를 만나게 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적과도 같은, 아름다운 꿈같은 실화였다.



아버지는 한번도 실의에 빠진 적이 없었어요.

그냥 계속 전진하고 포기 안하고 사는 거죠.


대신 뭘 하셨나요?


책을 많이 읽으셨어요.

정치나 지역 일에도 참여하셨고요.

발언권이 부족한 노동자들, 빈곤 계층 사람들 편에 힘을 실으려 하고요.


- <서칭 포 슈가맨> 로드리게스의 막내딸 인터뷰 중



그는 남들과 다르게 일을 봤어요.

마치 중요한 의식처럼 엄숙하게 대했죠.

이 지저분한 일을 8~10시간씩 하면서도 턱시도를 입는 거예요.

그는 진정한 시인이나 예술가만이 지닌 신비한 힘으로 주변에 널린 흉하고 평범한 것, 속되고 비루한 것을 탈바꿈시켰어요.

예술가란 바로 선구자죠.

음악적 희망은 꺾였어도 그의 정신은 남아 새로운 곳을 찾으며 나아가기 위한 길을 닦았어요.

그는 이게 다가 아닐 거란 예감을 했죠.


- <서칭 포 슈가맨> 로드리게스의 동료 인터뷰 중



배경과 사연을 모르고 그의 노래를 먼저 들었다면 내 스타일이 아니라거나 그냥 흘려버렸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를 찾아가는 영화의 여정 내내 낡고 부서진 건물들이 즐비한 디트로이트와 혼란의 70~80년대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배경으로 흐르던 그의 노래는 시처럼 오래 여운이 남았다.


영화 초반만 해도 끝내 분신자살에 이른 안타까운 사연인 줄만 알았는데 모두의 예상을 깨고 엄연히 40여 년간 자기 자리에서 변함없이 최선을 다해 오물 청소를 하거나 인부로 살아가고 있는 지긋한 나이의 그가 나타났을 때 아 하는 탄성과 눈물이 나왔다.


기회가 주어지면 노래를 하고 앨범을 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던 더 오랜 시간 동안에도 삶을 멈추거나 포기하지 않고 막노동을 하면서도 자녀들과 도서관, 박물관, 과학관, 미술관 등을 다녔고 책과 그림, 음악을 통해 예술을 즐겼다. 그러다 30년이 지나 지구 반대편에서 자신을 찾을 때 그는 또 기꺼이 무대에 올라 멋지게 해낸다. 모두가 기적이라 하는데 그는 과장하거나 성취감에 도취되지 않고 다시 돌아와 다른 집 잔디를 깎고 청소를 하며 검소하게 밥벌이를 해나간다.


그야말로 진정한 예술가구나 싶었다. 삶의 고통과 아픔을 모두 불평 없이 살아내며 아름다운 것으로 승화시키는 사람이니까. 재능과 노력을 모두 쏟고도 처참한 실패를 맛본 그가 망가지지 않고 인생이 원래 그런 것이다 라고 나직이 말했을 때 그가 존경스러웠다.


내 재능을 세상이 몰라주는 것만 같아 대상도 없는 원망을 품은 적도 있었다.

나에겐 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지 밑도 끝도 없는 실망을 한 적도 있었다.


슈가맨은 그런 나를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부끄럽게 만들었다.

당장 한 달 즈음되니 브런치에 꾸준히 쓰는 일조차 점점 버거워지는 스스로를 반성하게 했다.


감히 예술과 기적을 말하기 전에 진짜 예술가는 성실하고 진실되게 오늘을 산다.

최선을 다해.

이전 05화 당신이라는 낯설고 멋진 신세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