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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gainJ Oct 13. 2021

우표처럼 추억을 모아볼게, 차곡차곡

왓챠 <테스와 보낸 여름>

이제 와 여름휴가 이야기라니 다소 현타가 올지도 모르겠다. 계절은 이미 창틈 사이로 밀려드는 찬 공기만으로도 무릎 담요 밑으로 삐죽 나온 두 발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중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월 둘째 주 대체 휴일을 집에서 뒹굴거리며 이 영화로 마무리했던 건 좋은 선택이었다고 본다.


귀여운 십 대들이 바닷가에 나란히 앉아있는 포스터만으로도 사랑스러움이 물씬 느껴지는 이 네덜란드 영화는 뜻밖에도 모래사장에 깊은 관 모양을 파고 누운 남자 주인공 샘의 심오한 대사로 시작된다.  



얼마 전부터 계속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동물과 인간이 언젠가는 죽을 거라는 생각 말이다.

아빠도, 엄마도, 형도...... 나도.



영화는 테르스헬링이라는 아름다운 네덜란드의 섬에서 샘 가족이 보내는 평범한 듯 특별한 여름휴가 일주일을 그렸다. (참고로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my extraordinary summer with Tess>) 여느 또래 아이들처럼 여름휴가 중 가족들이랑 즐겁게 공놀이를 하고 간식을 사 먹고 우연히 만난 이성친구 테스에게 관심을 보이는 보통 소년 샘은 순수하면서도 진지하다. 종종 엉뚱하고 심오한 질문으로 주변에서 4차원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최후의 공룡은 죽을 때 알았을까?

자기가 마지막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혼자 남겨지면 어떤 기분이 들까?

나는 막내니까 다들 나보다 먼저 죽을 것이다.



심각한 고민에 빠진 샘은 매일 시간을 늘려가며 혼자 바닷가에서 '외로움 적응 훈련'을 수행하기로 계획한다. 하지만 샘의 이 황당하고 귀여운 계획은 자꾸만 틀어진다. 당장 자신의 아빠를 찾으려 과감한 사건을 벌인 테스를 도와야 한다. 그러면서 샘은 속을 알 수 없었던 테스를 이해하게 되고 그녀의 아픔에 공감하며 둘의 관계는 깊어진다.


어느 날에는 갯벌에 혼자 훈련을 나섰다 발이 빠져 옴짝 달짝 못하다 이웃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다. 지난날 외딴집에 혼자 사는 할아버지의 외양만 보고 무서워 도망갔던 샘은 이제 마음을 열고 할아버지 집에서 몸을 녹이고 굴을 먹으며 묻는다.



샘: (젊은 부부 사진을 가리키며) 할아버지 부인이에요?

할아버지: 그래.

샘: 살아 계세요?

할아버지: 아니...... 그게 우리들 삶이고 인생인 거지.

샘: (주저하다) 힘든가요?

혼자 남겨지는 거요.

할아버지: 여전히 매일 보고 싶지만 내게는 행복한 추억이 아주 많단다.

우리 인생은 머릿속에 기억으로 남아있어.

그 안에 아내도 살아 숨 쉬고 있는 거지.

함께한 모든 순간이 소중하단다.

더 많은 추억을 남겼다면 좋았겠지.

세상엔 돈을 모으는 사람이 있고

우표를 모으는 사람도 있지.

또 어디서 들었는데 킨더 초콜릿을 모으는 사람도 있다더라.

최대한 많은 추억을 모으거라.

함께 보내는 순간들 말이야.

너무 늦기 전에.



원작 소설이 있어 그런지 영화는 사랑스러운 주인공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한 편의 아름다운 동화 같았다. 특히 놀랍게도 첫 장편 영화라는 두 신인 아역 배우들의 매력이 엄청났다. 해맑으면서도 섬세한 감정 연기와 개성 있는 에너지를 가진 샘과 테스 덕분에 다소 무겁거나 진부할 뻔했던 주제의 영화가 따뜻하고 특별해졌다.


아울러 샘과 테스는 특별하지만 특이한 아이들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감독은 제작 노트에서 현실적이고 평범한 캐릭터를 만들고 싶었다 했다. 어린아이가 여름휴가에 가서 죽음을 생각하다니 의아할 수도 있겠지만 유년 시절을 곰곰이 생각해 보거나 아이를 키워봤다면 아마도 공감하리라 믿는다. 우리 아이도 한 때 집착적으로 죽음을 생각하고 두려워했던 적이 있었다. 아이가 특별히 조숙하다거나 온종일 죽음만 생각했던 건 아니었지만 잘 놀다가도 자기 전 문득 엄마는 절대 죽으면 안 돼 라며 꼭 껴안거나 난 죽기 싫은데 하며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봐 말문이 막힌 적이 종종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상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아이들에게도 늘 중요한 주제일 거다.


결론적으로 착한 영화라 좋았다. 영화에는 나쁜 어른이 한 명도 없다. 죽음을 고민하고 엉엉 우는 샘에게는 늘 따뜻하게 품어주는 아빠와 무심한 듯 챙겨주는 형이 있고 지켜봐 주는 다른 어른들이 있다. 사정을 모두 알게 된 테스의 아빠마저 이 모든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영화는 다 함께 라틴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는 파티로 끝이 난다. 그리고 휴가를 마치고 돌아가는 배에서 샘은 이상하고도 특별한 일주일을 보내고 더 이상 외로움 적응 훈련은 하지 않아도 된다 결론 낸다. 대신 사람들과 더 많은 추억을 만들겠다고.


여름휴가는 언제 다녀왔는지 아득하기만 하고 계절의 한기에 마음도 몸만큼이나 움츠러드는 것 같은 날, 다시금 회복할 수 있는 따뜻하고 행복한 여름휴가 추억 하나를 나도 덤으로 받은 기분이다. 조만간 따뜻한 겨울 슬리퍼를 챙겨 신고 아이와 함께 다시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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