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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gainJ Mar 08. 2022

어둠이 아니라 빛이라, 밤이 아니라 대낮이라

김지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구정 연휴 동안 한 단어, 한 문장을 넘길 때마다 아 하고 낮은 탄성을 내뱉으며 꼭꼭 씹어 이 책을 음미했더랬다.  그리고 입에 그 단 맛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분의 소천 소식을 접했다. 3월 즈음이면 당신은 이 세상에 없을 거라던 예언처럼.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위해 생사를 공부하는 사람' 이 스승이라는 이 책의 저자이자 인터뷰어, 김지수 작가의 말처럼 과연 이 시대의 '스승' 답구나 싶게.




김지수: 무엇보다 스승은 내게 죽음이 생의 한가운데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싶어 했다. 정오의 분수 속에, 한낮의 정적 속에, 시끄러운 운동장과 텅 빈 교실 사이, 매미 떼의 울음이 끊긴 그 순간...... 우리는 제각자의 예민한 살갗으로 생과 사의 엷은 막을 통과하고 있다고. 그는 음습하고 쾌쾌한 죽음을 한여름의 태양 아래로 가져와 빛으로 일광욕을 시켜주었다.


(중략)


이어령: 우리가 죽음을 의식한다는 것도 바로 그런 거라네. 시끄럽게 뛰어다니고 바쁘게 무리지어 다니다 어느 순간 딱 필름이 끊기듯 정지되는 순간, 죽음을 느끼는 거야. 정적이 바로 작은 죽음이지. 우리가 매일 자는 잠도 죽음이거든. 우리가 침묵의 소리를 들을 때, 그걸 잡아채야 해.


(중략)


이어령: 세속적인 시간의 틈을 찢고 싹 그런 순간이 나오는 거지. 떠들고 호흡하고 먼지가 있고 싸우고...... 그건 우리의 시간이지만 우리의 시간 웨이브를 비집고 가끔 천사의 시간, 죽음의 시간, 침묵의 시간이 들어온다네.


김지수: 침묵을 만들고 침묵을 견딘다는 건 내공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 낯선 시간을 자주 감각하는 사람이 예술가가 되고 철학자가 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어릴 때 그런 체험들이 더 잦은 건 왜인가요?


이어령: 어머니 태에서 가지고 나온 천상의 시간 기억이 완전히 닫히지 않은 거지. 커서도 내세라든지 전생이라든지 우리의 체험과 상관없는 공백의 시간을 느낄 때가 있지 않던가. 공백의 시간이 확장되고, 정적이 완전히 점령한 세계가 죽음일세.


죽음은 고통이야. 그런데 고통이 죽음은 아니지. 고통이 끝나는 공백, 시끄러움이 끝나는 정적...... 그러니까 고통까지도 죽음밖에 있는 거라네. 숨이 넘어가서 무로 돌아가는 그 순간은 우리가 체험할 수도 느낄 수도 없어.


(중략)


이어령: 죽음은 신나게 놀고 있는데 엄마가 '얘야, 밥 먹어라' 하는 것과 같은 거라고.


(중략)


이어령: 죽으면 '돌아가셨다'고 하잖아. 탄생의 그 자리로 가는 거라네. 그래서 내가 일관되게 얘기하는 것은 죽음은 어둠의 골짜기가 아니라는 거야. 까마귀 소리나 깜깜한 어둠이나 세계의 끝, 어스름 황혼이 아니지.


김지수: 눈 부시게 환한 대낮이지요.


이어령: 5월에 핀 장미처럼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대낮이지. 장미 밭 한복판에 죽음이 있어. 세계의 한복판에. 생의 가장 화려한 한가운데. 죽음의 자리는 낭떠러지가 아니야. 고향이지.


김지수: 그 말이 왜 이토록 아름다울까요.


이어령: 어둠이 아니라 빛이라서, 밤이 아니라 대낮이라 그렇지.




죽음은 내게 아직 정리하지 못한 주제 중 하나지만 주로 입 밖에 꺼내기 두려운 미래, 외면하고 싶은 어둠이었다. 특별히 각인된 죽음도 있었다. 고등학교 3년을 함께 보냈던 친구와 어렸을 때 아픈 엄마 대신 막내딸처럼 나를 키워주셨던 외할머니의 죽음이었다.


친구의 죽음은 너무나 갑작스러워 사실 그녀의 부재를 난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우리 반 여자 친구 열다섯 중 가장 몸과 마음이 건강했던 친구였고, 내가 부러워했던 그 밝고 단단함으로 서울대 졸업 후 아이들에게 윤리를 가르치던 모습이 꼭 어울렸던 멋진 사람이었다. 그런 친구가 암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니 아무리 우리가 각자 결혼 후 몇 년간 연락을 제대로 못했었다 해도 갑자기 이렇게 사라질 수는 없는 거였다. 그 새벽 런던에서 갑자기 마구 울려대던 단톡방 알림 소리에 자다 깨어 멍하니 띄엄띄엄 읽어 내려갔던 현실감 없는 단어들이 아직도 이 세상 어딘가를 부유하고 있다.


할머니의 죽음은 조금 달랐다. 당뇨에서 시작된 할머니의 말년은 길고도 지난했다. 여행을 그렇게도 좋아했던 할머니가 목욕탕에서 한번 넘어진 후로 회복을 못하고 집에만 계시더니 이내 꼼작 없이 누워 계셨고 종내에는 병원에서 대소변을 다 받아내고 욕창이 생기는 모습까지 수년간 그렇게 곱던 할머니가 조금씩 녹아내리는 과정은 너무도 아팠다. 그래선지 나의 예비 신랑(현 남편)에게 정말 오랜만에 고운 미소 한 번 띄워주신 후 우리 결혼기념일에 '고향으로 돌아가신' 할머니는 눈을 완전히 감고 나서야 비로소 곱고 순한 웃음을 되찾았다. 자주 업혔던 할머니 등의 온기 대신 차가운 할머니 손을 붙잡고 마지막 인사를 하자니 비로소 영영 이별이란 게 실감 나서 많이 울었지만 그래도 예쁜 우리 할머니의 염하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빼지 않고 지켜보았다. 할머니가 정말 그간의 고통에서 해방되어 좋은 곳으로 갔을 거란 확신이 들었으므로. 할머니는 죽음마저 따뜻했다.


하지만 내게 책임져야 할 생명이 생기고 엄마 죽으면 절대 안 돼 하고 다짐받는 순수하고도 집요한 눈빛을 마주하며 나는 절박해졌다. 죽음이 아련하고 낭만적인 시어 즈음인 줄 알았던 시절, 한동안 전혜린에 빠져 치열하게 살다 일찍 죽어도 괜찮겠다 싶었는데 죽음이 아무 때나 불쑥 튀어나오는 현실인 지금은 내가 엄마로서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아프지 않고 오래 함께 해주는 것이 아닐까 간절히 바래보는 것이다.


이런 내게 스승께서 들려주시는 죽음은 세상의 끝이나 암흑이 아니라 대낮의 정적, 고향으로 돌아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스승은 끊임없이 담담하게 죽음을 말하는데 책을 읽으나는 도리어 삶을 자주 생각했다. 매일이 죽고 새로 태어나는 삶이다. 스승은 두려운 정적을 견뎌야한다 한다. 나의 속도로 걸어가다 언젠가 내가 태어난 그곳으로, 대낮의  속으로 들어가는 거라고, 아름답고 찬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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