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언제나 새 고양이로 온다

박연준 <쓰는 기분>

by againJ

시인이 쓴 산문을 좋아한다.


문학을 좋아하고 전공이기도 했던 만큼 친숙한 분야라고 믿는 내게도 솔직히 시는 늘 낯설다. 시의 언어는 생경하고 틀어지거나 해체된 문장들을 더듬어 함의를 읽어내기가 무척 막막한 기분. 그러다 시인들이 쓴 긴 글을 읽을 때야 비로소 그들의 언어 다루는 솜씨에 탄복하고 낯을 많이 가리던 상대가 실은 누구보다 다정하고 섬세한 사람이란 걸 알게 된 대화의 끝처럼 즐겁다.


이 책을 어떻게 추천받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처음 이름만 듣고는 막연히 젊은 남성 작가가 아닐까 했을 정도로 무지한 상태에서 읽기 시작했다.


아주 좋은 글은 목차만 읽어도 전율이 온다. 첫 장을 펼치자마자 눈길을 끄는 목차를 오래 훑었고 멀리 가지 못하고 서문에 또 한 번 붙들렸으니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도 전에 이미 그녀의 다른 책들을 검색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과연 책은 서문의 감동을 배신하지 않았다. 그리 길지도 않은 책이었는데 기억하고 싶은 아름다운 문장들과 글에 포스트잇을 빼곡히 붙여가며 천천히 읽고도 책장을 덮기가 아쉬워 책 모서리를 붙들고 한참을 만지작거렸다.


책에는 감동적인 시구들도 많았지만 지금은 친절한 시인의 쓰기를 위한 조언들부터 공유할까 한다.


우선 어떻게 써야 하는가에 관하여.




내가 상정하는 독자는 언제나 ‘잘 보이고 싶은, 모르는 사람’이다. 독자를 아는 사람으로 상정하지 않는 건 아는 사람에겐 해야 할 말을 생략하거나 필요 없는 말을 하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글에서 해야 할 말을 하지 않고 대충 분위기만 피우다 끝내면 속 빈 강정이 되기 쉽다. 필요 없는 말을 하게 되면 사변적이고 꾀죄죄한 글이 된다. 둘 다 위험하지만 후자가 더 위험하다. 일기와 에세이는 여기에서 가름 난다. 일기를 잘 쓰면 수기가 되지만, 이 또한 에세이는 아니다. 에세이는 생각을 확장시키는 데 도움을 주지만 수기는 읽고 나면 딱히 할 일이 없다. 수기는 ‘나’가 주인인 글이고, 에세이는 ‘독자’가 주인인 글이다. 일기는? 진짜 일기는 독자가 없다.

(중략)

글을 쓸 때, 쓴다고 생각하는 것과 말을 건넨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르다. 말은 글의 알맹이다. 알맹이가 실하면, 글은 (저절로) 피부가 되어준다. 존 버거식으로 말하자면 작가와 이야기꾼의 차이다. 이야기꾼은 상대와 소통하려 하고, 젠체하지 않으며, 정보가 아닌 ‘이야기’를 전달하려 한다. 자연스러운 태도를 지닌다. 에세이를 쓸 땐 언제나 나보다, 내 이야기보다, 듣는 당신을 중요히 생각한다. 내 이야기지만 당신,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나’를 내세우고 끝나는 글은 읽고 나면 순식간에 사라진다. 케이크 같다.

(중략)

시작할 땐 먼 곳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화자와 독자 사이의 거리, 이야기가 중심부로 다가오는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 이야기에서 화자의 말투는 문체가 된다. 문체에서 매력이 발생한다. 사실 모든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게 ‘매력’이다. 작품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것. ‘이것을 읽는 동안 당신이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주문을 거는 것. 자연스러움을 유지한 채 긴장하는 것. 이게 어렵다. 온몸으로 인지하면서, 동시에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것. 당신을 이쪽으로 유혹해 붙잡아두려는 것.




'생각을 확장시킬 수 있는 매력적인 우리의 글'을 써야 한다니 결코 쉽지 않은 목표지만 마음에 담아두면 조금은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게 되겠지. 그럼 우린 그 목적지에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하루 종일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거나 텔레비전을 몇 시간 동안 내리 보고, 자극적인 음식을 배달시켜 먹고, 누가 보여주는(저절로 상영되는) 남의 삶을 들여다보고, 짜고 현란하고 시끄러운 감각을 몸속에 내리 넣은 날에는 영혼의 결이 달라져있다. 두껍고 탁하고 냄새나고 건조하다. 반짝이는 아이디어나 순한 마음, 먼 곳을 생각하는 느린 마음 같은 건 가지기 어렵다.


이런 상태의 몸에는 시(물리적인 ‘시’뿐 아니라 우리가 ‘시’라고 믿는 일 일체)가 오지 않는다. 시가 고결하고 깨끗한 거라서가 아니라 시는 ‘경화硬化’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굳어있는 것, 변할 수 없는 것. 기성과 비슷해진 영혼을 시는 견딜 수 없어한다.


바꿔야 한다. 완전히 탁해지기 전에. 종이의 색을 파랑에서 초록으로 바꿔야 하는 사람처럼 마법을 부려야 한다. 오래 걸릴 수도 있다. 움직이는 장면의 합으로 이루어진 영상을 오래 보면 책을 읽기 어렵다. 책은 움직이지 않는 장면(무대)에서 느리게 걸어 다니는 언어를 좇아, 독자가 움직여야만 작동하기 때문이다. 내가 움직이느냐, 네가 움직이느냐. 이 차이가 크다. 시는 스스로 움직이는 자에게 호기심을 갖는다.


몸처럼 영혼도 자주 씻어야 한다. 스트레칭과 다이어트가 필요하다. 자존감이란 자기 영혼의 형태에 스스로 만족할 때 생기는 걸지도 모른다.




이 부분에서 스스로 얼마나 뜨끔하던지 근처 있던 스마트폰을 슬금 뒤집어 놓았다. 더 탁해지고 굳어버리기 전에 스스로 움직여 영혼에도 새로운 공기를 집어넣어야 한다. 자연스럽게, 목적 없이 순수하게 마음껏 쓰고 또 쓰는 습관이 몸에 배기를. 쓰고자 하는 사람은 읽는 것조차 쓰기 위해 읽어야 한다는 시인의 아낌 없는 조언을 꼭꼭 새겨 본다.



오후에 도리스 레싱의 글을 읽다 이런 문장을 만났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뒤에는 새로운 사람, 동물, 꿈, 사건이 생기지 않는다(아주 어린 나이에 이렇게 되는 사람도 있다). 모두 전에 겪었던 일, 전에 만났던 사람이 다른 가면을 쓰고 나타날 뿐이다.

도리스 레싱, <고양이에 대하여>


더 이상 새로운 사람, 동물, 꿈, 사건이 생기지 않는 삶을 살 순 없다. 깨트리기! 쓴다는 건 멀쩡히 굴러가는 삶을 깨트리는 일이다. 깨트린 뒤 다시 조합해 새로 만드는 일이다.


책을 마무리할 때쯤, 내 삶에 고양이가 들어왔다. 내 첫 고양이이자 새 고양이다. 이름은 당주, 별명은 로티플(로얄 스트레이트 플러쉬!), 이명은 소안, 내가 자주 부르는 호칭은 귀염둥이. 고양이를 보며 생각한다. “새로운 사람, 동물, 꿈, 사건”이 생기려면 무언가를 사랑하고 뛰어들고 다치고 도망가고 잡고 빼앗기고 슬퍼하고 으깨져야 한다. 가만히 두면 마음은 굳는다. 움직여야 한다.


시는 언제나 새 고양이로 온다.


당신에게도 “새로운 사람, 동물, 꿈, 사건”이 생겼으면 좋겠다.


날마다 당신의 공책에서.

하염없는 글자들 속에서.

새로워지기.


어떻게 새로워질 수 있지, 당신이 묻는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연필을 쥔 사람은 자기 삶의 지휘자가 될 수 있다고.

태어난 모든 사람은 (우리가 어릴 때 힘들이지 않고 그렇게 했듯이) 시를 쓸 수 있다.


박연준, <쓰는 기분> 서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