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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gainJ Feb 27. 2024

그건 사랑인 줄만 알았지

지난달부터 아침마다 1시간 반 정도 요가 경전인 바가바드 기타를 읽고 있다. 쉽게 풀어 옮긴 번역본이고 두 달 동안 3번 즈음 읽었는데 여전히 생소하고 알듯 말듯 어렵다. 아무리 냉담에 가까운 신자라도 천주교인으로써 어느 부분에선 이교도가 된 것 같은 느낌도 있어서 심리적인 거부감도 있었다.


잘 이해도 안 되고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꾸준히 반복적으로 읽고 있는 이유는 혼자 차를 마시며 요가 경전을 읽는 것으로 시작하는 고요한 아침이 실질적으로 수련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무언가 있구나, 내가 모르는 요가의 세계가 이렇게 넓구나 하는 느낌으로 더듬더듬 와닿는 단어들에 성경 묵상하듯 머물러봤던 것 같다.


가장 먼저 와닿은 단어는 집착.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자신의 다르마, 즉 의무를 행하라는 말은 바가바드 기타에서 중요하게 자주 반복된다. 굳이 바가바드 기타까지 들어가지 않아도 자주 들어봤을 뻔한 말이기도 하지만 경전을 읽고 이 구절을 생각하며 수련실에 들어가면 편안한 마음이 되었다.


얼마나 자주 아사나에 집착했던가. 거의 모든 글에 등장했던 물구나무서기며 우르드바다누라아사나에 대한 집착은 식겁할 수준으로 요가 인생 6년 내내 현재진행형이다. 벽에 기대지 않고 혼자 오롯이 서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제 혼자 설 수는 있는데 어떻게 하면 조금 더 몸을 세울 수 있을까? 좌우 힘을 고루 분산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허리 힘을 빼고 후굴은 어떻게 하는 걸까? 팔을 주욱 편 채 호흡을 편안히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다리로 힘의 중심을 옮기고 컴업을 준비하기 위해 팔을 가까이 접근하려면 골반을 어떻게 써야 할까?


수련 기간이 길어지면서 목적이나 관심사는 약간씩 달라졌지만 집착은 더 강해졌다. 약간만 어떻게 해보면 될 것도 같은 닿을랑 말랑한 느낌이었다. 힘겹게 한 단계 넘어가면 다시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는데 어제 가능했던 아사나가 오늘 안되면 그 이유가 뭘까 자꾸 돌이켜 보게 되고 안달이 났다.


돌이켜보면 집착인데 그 순간엔 지극한 사랑인 줄만 알았다. 너무 좋으니까 잘하고 싶어서 온 마음과 힘을 다해야 하는 거라고 스스로 믿었으니까. 그러다 이명도 오고 일자목과 굽은 등과 어깨는 계속 담이 오고 왼 골반은 앉지 못할 정도로 시큰거리는 부상을 계속 겪었는데 몸보다 마음이 더 아팠다. 이렇게 시간과 열정을 썼는데 왜 이만큼 밖에 안될까 결과에 실망하고 좌절했다.


질척거리는 사람은 질색이었는데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인정할 건 깨끗하게 인정하고 새롭고 기쁜 마음으로 오늘의 아사나에 집중해 본다. 내가 원하는 목표와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 게 아니라 오늘 해야 할 아사나를 '그냥' 한다.


신기하게도 이 단순한 마음이 과거도 미래도 없이 현재만 집중할 수 있게 해 준다. 호흡을 넣고 들숨과 날숨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한다. 그러다 보면 부자연스럽던 아사나가 조금 더 다가온다. 언젠간 완전히 내 것이 될 날도 있을 것이다.


낯부끄러운 집착이었지만 그래도 남는 건 있었다. 아침마다 지금 여긴 어디 같은 기분으로 바가바드 기타를 읽으면서도 무언가 깨달은 건 내 안에 축적된 경험치들 때문일 거다. 육아도 책으로 먼저 했던 내가 요가에 있어서만큼은 미련하게 온갖 추태를 부리며 몸으로 먼저 부딪혀봤던 건 잘못된 집착이었다 해도 의미는 있었다고 생각한다. 경험의 틈을 깨달음으로 조금씩 메워가며 배운 것들은 오래 남는다.


집착과 사랑의 경계는 아주 얇다. 사랑은 나를 확장시키지만 집착은 나를 갉아먹고 갈증나게 하고 불행하게 한다. 성경보다도 먼저 씌여졌다는 현명한 신의 노래와 매일의 아사나를 통해 조금 더 현명하게 집착 없이 사랑할 수 있기를.



그대의 다르마는

그대에게 부여된 일을 하는 것이다.

행위의 결과는 그대가 관여할 부분이 아니다.

행위의 결과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그것을 목적으로 행위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어떠하든지, 그대의 의무를 피하면 안 된다. (2.47)


아르주나여,

직관적인 식별력을 갈고닦는 붓디 요가를 수행함으로써

결과에 집착하는 행위에서 멀어지도록 하라.

행위의 결과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그들에게는 뜻대로 되지 않는,

바라는 결과에 대한 목마름이 그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49)


바가바드 기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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