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스탄 게츠
원래 가을장마란 단어가 존재했던가? 새삼 기억을 더듬어 보게 되는 요즈음. 익숙했던 계절과 기후가 급변하고 있다는 걸 실감한지는 좀 되었지만 유난히 장마도 없이 휘릭 지난 것만 같은 올 여름과 그 끝자락에 다다라서야 매일같이 흐리거나 비가 오는 요 며칠이 어쩐지 무척 낯선 느낌이다.
어렸을 땐 대중교통을 타면 코 밑으로 훅 밀고 들어오는 온갖 것들이 뒤섞인 그 냄새 때문에, 혹은 아무리 조심하고 걸어도 집에 들어와 보면 어느 틈엔가 신발 속 양말이 다 젖어 버렸기 때문에 비 오는 날이 싫었다. 지금도 유난히 화장실 하수구 냄새가 올라오는 날이나 피부에 닿으면 쩌억쩌억 소리가 나는 찐득한 의자에 앉거나 온갖 것들이 다 붙는 것 같은 눅눅한 마룻바닥을 맨발로 걸을 때 싫다.
하지만 더 이상 비 오는 날도 어김없이 만원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야 하는 직장인이 아니라 그런지 작년에 드디어 마음먹고 건조기를 들인 후 언제든 보송한 수건을 쟁여둘 수 있다는 든든함 때문인지 이제 비가 싫지만은 않다. 비 오는 날은 무언가 타야 하는 먼 외출은 되도록 자제하고 크록스를 신고 투명 비닐우산 하나 챙겨 들고 가볍게 공원이나 동네를 산책하면 꽤나 행복한 일인 걸, 어릴 때부터 유달리 비 냄새 좋아하고 비 오는 날을 사랑하는 딸 덕에 조금씩 깨달아 가는 중이다.
그래도 비 오는 날은 집에 머무는 게 조금 더 좋긴 하다. 창을 조금 열어 툭툭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들으며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소파에 앉아 커피 한잔에 책 한 권 읽으면 더 바랄 게 없다.
거기에 더해 언젠가부터 비가 오면 무작정 카레를 만들고 싶어 진다. 비 오는 날은 재즈지 라고 능청스럽게 말하는 웃기고 신기한 우리 집 열두 살 아이가 틀어놓은 스탄 게츠의 'The Girl from Ipanema'를 배경 음악 삼아 나는 카레 만들 준비를 한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카레를 만들자. 우리 집은 모두 매운 걸 잘 먹는 편이 아니라 카레는 일본식에 가깝게 만드는 편인데 요즈음 가장 애정 하는 카레는 '카레여왕 구운 마늘&양파'. 쿠팡에도 있으니 생각났을 때 쉽게 주문할 수도 있다. 재료도 가장 기본이 되는 양파, 감자, 당근만 있으면 족하다. 우리 집은 감자를 좋아하니 감자는 보통 사이즈로 두 개 즈음 넉넉하게, 나머지 재료는 한 개나 그것보다 조금 적은 양을 썰어둔다. 카레 1봉 기준으로 소고기 200g 정도를 준비해서 기름을 두른 2리터 정도 크기의 냄비에 마늘다짐을 한 스푼 정도 넣고 함께 볶다 소금, 후추로 살짝 간을 한다. 소고기의 고소한 향이 퍼지면 나머지 재료들은 한꺼번에 넣고 볶아준다. 그리곤 물을 냄비 3/4 즈음 넉넉히 붓고 충분히 끓인다. 카레 여왕의 경우 육수가 들어 있어 따로 치킨스톡은 넣지 않는 대신 초콜릿 한 조각은 넣어주면 맛이 깊어진다. 이걸로 끝.
특별할 것도 없는 이 쉬운 레시피를 굳이 적어본 이유는 내가 카레 만드는 과정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적으면서도 왠지 기분이 좋아진다. 카레를 만들 때 그 리듬감이 좋다. 집에 늘 있는 소박한 재료들만 있으면 특별한 기술 없이 비슷한 크기로 적당히 썰고 그걸 다시 볶아 한 데 모으고 카레 소스만 부으면 크게 실패할 염려 없이 완성되는 한 그릇 요리. 카레를 만들다 보면 내가 어렸을 때 좋아했던 단추로 끓인 수프 이야기를 보는 것 같다.
카레의 비법은 그저 시간의 여유를 두고 천천히, 오래 끓이는 것이다. 그래서 난 하루 전 날이나 그날 오전에 만들어 두었다 저녁에 먹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만드는 동안 부담 없고 한 그릇으로 영양상 균형이 있으며 누구에게나 익숙한 요리가 또 무엇이 있을까. 이러니 집밥은 좋은 식재료에 방점을 두고 조리법은 무리가 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간단해야 한다고 믿는 내가 애정 할 수밖에.
카레를 만들어 둔 날이면 남편 도착 30분 전 전기밥솥에 밥만 해두면 된다. 반찬도 많이 필요 없으니 오목하고 넓은 접시에 밥과 카레를 가지런히 담고 단정하고 작은 종지들 꺼내 조금 담아 둔다. 평소에도 한식 상차림엔 수저받침을 사용하곤 하는데 특히 카레의 경우 바닥에 노란 물 드는 게 싫다면 수저받침은 필수. 이렇게 준비된 식탁에 둘러앉아 갓 한 따끈한 흰쌀밥에 적당한 농도의 카레를 얹어 장아찌류나 김치에 곁들여 먹는 시간. 이때 김치냉장고에 넣어두었던 아주 시원한 맥주 한 캔(기분상 일본 맥주가 가장 잘 어울리는 조합인 느낌)을 따서 남편과 나눠 마실 수 있다면. 아주 간단한 저녁상이지만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지는 비 오는 날의 맛이다.
이 글을 쓰며 다음 주 일기예보를 보니 또 비가 온다.
내일은 다시 카레를 만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