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심플 멸치 육수
9월로 앞자리가 바뀌면 신기하게도 바람의 결이 달라진다. 여름내 열어둔 채 잠들었던 습관대로 거실 베란다 창을 열고 잠들었다 아침에 살짝 냉기가 든 거실로 나오면 선선하게 부는 바람이 몸속 깊숙이 와닿는다. 좋아하는 소슬바람이다. 몇 년 새 심해진 비염 때문에 이내 콧물을 줄줄 흘리고 재채기를 해대는 통에 곧바로 창을 닫아야 하지만 온몸으로 계절의 변화를 체감한다.
가을이다. 이 기분은 곧 올 해도 금방 가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달랑거리는 남은 달력 네 장이 약간의 허무한 느낌을 줄 때, 바람이 폐부 깊숙이 파고들어 마음에 구멍이 난 것 같은 날, 이런 날 저녁엔 어묵탕이다. 어육 함량이 높은 좋은 어묵을 오래 푹 끓여 따끈한 국물과 함께 간장에 콕콕 찍어먹는 기분. 차가운 맥주도 역시 빠질 수 없고. 원래도 어묵을 좋아하지만 이 계절에 먹는 어묵탕은 특히나 맛있다. 마치 폭신한 거위털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 덮고 왼쪽 다리만 꺼내 두고 잘 때 느끼는 기분 좋음이다.
시중에 좋은 어묵과 구입 방법이 여럿이겠지만 귀차니즘이 있는 난 주로 로켓프레시로 장을 볼 때 삼진어묵 옛날모듬어묵도 함께 주문해둔다. 평소 기본 꼬치 어묵을 좋아하는 스타일인데 꼬치는 끓일 때 번거롭기도 하고 여기 들어있는 여러 종류의 어묵들은 도톰한데도 맛이 고루 괜찮은 편이라 골라 먹는 재미가 있다. 양도 많아서 보통 우리 집 세 식구 기준으로는 두 번 이상 나눠 사용 가능하다. 반 즈음 어묵탕을 끓이고 남은 반은 냉동 보관했다 떡볶이나 볶음 반찬에 활용한다.
이때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은 기본 육수.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는 일요일 저녁엔 꼭 잊지 않고 일주일치 멸치 육수를 준비해둔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난 건강하지만 심플한 맛과 레시피를 선호한다. 그래야 늘 즐겁게 집밥을 해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육수도 아주 간단하다. 2리터 들이 냄비에 넉넉히 물을 넣고 멸치 열 마리 즈음, 디포리 두세 마리, 다시마 두 조각 즈음을 넣어 끓이기만 하면 된다. 가끔 파뿌리나 표고버섯 기둥이 있으면 넣기도 하는데 대체로 깔끔하게 멸치 다시마 육수 내는 편을 선호한다. 대신 이 육수도 시간의 여유를 둬야 한다. 팔팔 끓기 시작하면 중불로 줄여 20 여분 끓여주고 불을 끈 후 재료를 건지지 않은 채 한참 둬보자. 날이 서늘할 때면 냄비채 그대로 두었다 다음 날 아침 용기에 담아 냉장 보관해도 무방하다. 이렇게 멸치 육수 한 병을 냉장고에 채우고 한 주를 시작하면 언제든 빠르게 담백하고 진한 된장찌개, 근대국, 어묵탕, 잔치국수 등을 만들어낼 수 있다.
다시 어묵탕으로 돌아와서 어묵탕의 경우 이 기본 육수에 시원하고 달큰한 맛을 내는 무를 꼭 넣어야 한다. 양파를 넣어줘도 개운한 맛이 나는데 그건 선택적으로 넣어도 좋다. 그리고 어묵을 처음부터 넣어 오래 뭉근히 끓여주고 간은 국간장 혹은 맛간장 한 두 스푼을 기본으로 한 후 가장 마지막에 너무 밋밋하다 싶으면 모듬어묵에 동봉된 수프를 한 스푼 정도 첨가해주면 된다.
이제 어묵탕은 완성되었다. 작년에 식탁 위에 올릴 수 있는 멀티쿠커를 샀는데 원래 생각했던 고기 구워 먹는 용도로는 적절치 않지만 어묵탕과 같은 국물류를 천천히 데우며 먹기엔 무척 유용한 편. 냄비에 끓였던 어묵탕을 멀티쿠커로 옮기고 세 식구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주변에 둘러앉는다. 보글보글 끓는 소리에 따뜻한 열감이 우리 볼을 발그레 물들이고 작은 식탁을 가득 채운다. 각자 먹고 싶은 어묵을 골라 식초를 살짝 탄 간장에 콕콕 찍어 먹으며 오늘 하루를 이야기한다. 이때 차가운 맥주 한 잔을 곁들이면 뜨겁고 차가운 것들이 뱃속을 채우며 저절로 안온한 기분이 되곤 한다. 그러면서 스산한 바람에 움츠러들었던 마음이 살짝 녹는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늘도 잘 안된 일 속상한 일 많은 하루였을지라도 내일이 있으니까 하는 기분이 되고야 만다. 그리고 아직 우리에게 남은 가을과 겨울의 시간을 생각하며 호로록 남은 국물을 깨끗이 들이켜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 밤 조금만 부지런히 멸치육수를 쟁이자. 또 한주 열심히 치열하게 살아갈 나 자신을 위해.
따뜻한 국물의 위로가 필요한 소슬바람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