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바아사나(보트 자세)는 여전히 어려운 걸까?
뭐라고? 에카 파다 시르사사나?
이름도 어렵지만 자세는 더 기이한, 한 다리를 들어 목과 어깨 뒤로 넘기는 게 가능하다고?
아사나를 따라가기에 급급했던 시절은 지났지만 그렇다고 무념무상의 진정한 요기니도 되지 못한 애매한 수련생은 오늘도 수련 중에 속으로 여러 질문들을 쏟아낸다. 아예 모르는 아사나면 그나마 이런 동작도 있군, 역시 요가의 세계는 넓고 심오해 정도로 넘어가는데 문제는 80프로 이상의 질문은 스스로에게 따지듯 묻는 왜인 경우라는 것. 왜 (나만 혹은 여전히) 안되니?
이런 질문을 품고 수련을 하면 자주 괴롭다. 여전히 잘 열리지 않는 어깨나 가슴을 활짝 열 수 있는 방법을 얼른 찾고만 싶다. 우르드바 다누라 수련을 하며 바로 팔을 주욱 펴는 대신 팔을 반 즈음 굽히는 걸 2회 정도 반복하고 팔을 펴는 방법으로 접근했더니 가슴이 조금 더 열리면서 호흡이 한결 안정적이었다. 내친김에 조금씩 팔을 다리 쪽으로 좁혀간다. 하나, 둘, 바로 다시 호흡이 빨라진다. 팔을 움직이는 사이 다리 힘이 스륵 빠진다. 오랜만에 도움을 받아 컴업 수련과 백밴드 수련을 2회 정도하고 마무리한 날이었지만 아쉬움은 남는다. 요령이 없나? 아, 결정적 순간 다리 힘은 왜 빠지는 거냐고?
이럴 땐 다시 그런데 이명은 왜 생기게 되었지 라는 질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분명 컨디션도 좋았었는데 대체 왜? 그것만 아니었다면 지금 즈음 컴업, 백밴딩은 완성했을 것만 같은 괜스레 억울한 기분.
질문은 나란 인간은 왜 이렇게 애매한 인생을 사나까지 점점 몸집을 키운다. 어느새 인생은 반 즈음 가까이 온 것만 같은데 뭐 하나 딱 내세울 것 없는 초라한 인생이다. 내가 원래 이런 인간인 걸까? 내게 앞으로 남은 건 뭐지 같은 질문들이 계속 피어오른다.
더 이상 어리다고 할 수 없는 나이에 답을 모른 채 질문만 품고 살아간다는 게 날 다시 불안하게 만든다. 어렸을 땐 막연히 이 나이 즈음 되면, 혹은 내가 부모가 되면 나아지겠지 생각했는데 거울 앞 얼굴만 나이가 들었을 뿐 내 안은 여전히 그때 그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인지 뒤늦게 가벼운 철학책들을 슬쩍슬쩍 열어보게 되나 보다. 철학은 질문이라니까, 이 괴롭고 답답한 마음을 어디선가 해결해 보고 싶은 갈증으로 말이다. 그리고 질문을 살아내라는 말에 뜻밖에 큰 위안을 받는다. 그래, 지금 이 상태는 이상한 게 아니야. 원래 인생이란 질문을 살아내는 거라고.
"제대로 질문을 살아갈 때, 저는 질문이 저를 덮치게 둡니다. 그러면 이런 깊이 있는 질문의 상태가 자연히 변화를 불러옵니다."
"질문을 살아요?"
"네, 질문을 사는 겁니다. 오랜 시간 마음 한구석에 질문을 품는 거예요. 질문을 살아내는 거죠.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해결책을 찾아버려요."
좋은 말 같다. 질문을 살아내면서 남은 평생을 보내고 싶어 진다. 하지만 질문의 답은? 대답은 어디에 있는데? 이것이 바로 철학이 받는 부당한 평가다. 철학은 말뿐이야. 질문만 끝없이 늘어놓고 대답은 없어. 언제나 떠나기만 하고 도착하지는 않는 기차야.
니들먼은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철학도 분명 도착지에 관심이 있지만, 여행을 서두르지 않을 뿐이다. 이것이 그저 똑똑한 대답이 아닌 '마음의 대답'에 도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다른 종류의 대답, 예를 들면 머리의 대답은 그만큼 만족스럽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 그만큼 진실하지도 못하다.
마음의 대답에 도착하려면 인내심도 필요하지만 기꺼이 자신의 무지와 한자리에 앉으려는 자세도 필요하다. 끝없는 해야 할 일 목록에서 또 하나를 지우려고 성급히 문제 해결을 향해 달리는 대신, 의혹과 수수께끼의 곁에 머무르는 것. 여기에는 시간과 용기가 필요하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우리를 조롱할 것이다. 내버려 두라고, 제이컵 니들먼과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비웃음은 지혜의 대가다.
에릭 와이너,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