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23
운동을 안 한지는 1년 반이 훌쩍 지났다. 무산소와 유산소를 가리지 않고 어떤 운동이든 하지 않는 중이다. 애인은 필라테스를 끊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운동을 하지 않는 중이다.
1년 반 동안의 시간은 수면 시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의자에 앉아 있는 시간이 차지해 왔다. 원체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식사와 소피를 제외하고는 책상 앞에 앉아서 내리 10시간도 앉아 있을 수 있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며, 어떤 주말엔 총 걸음수가 13걸음에 불과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극소의 걸음수는 내겐 어떤 훈장 같기만 했다. 나는 앉아만 있어도 많은 것을 할 수 있었으며, 앉아 있는 내 자신이 좋았다.
그러나 비극은 내가 어릴 적부터 바른 자세를 습관화하지 못했다는 점에 있었다. 며칠 전부터 왼쪽 허벅다리가 저릿하고 피가 통하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앉아 있어도 불편함이 지속되었다. 다리를 꼬고 턱을 괸 채 책상에 앉아 있는 내 모습이 그제야 보였다. 온갖 안 좋은 자세란 자세는 다 하고 있었으면서 1년 반이 지나서야 몸이 신호를 주다니, 몸이 둔감했던 건지 참을 만큼 참았던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바른 자세를 해도 불편함은 계속되어서, 나는 괜히 의자 탓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웬걸, 의자의 앉는 부분은 왼쪽으로 조금 기울어 있었다.
나는 기울어져 있는 것에 민감한 편이다. 이를테면, 새 책상을 조립하는 데에는 15분도 채 걸리지 않았지만, 책상 글라이드를 조정해 수평을 잡는 데에는 2시간을 쏟는 식이다. 방바닥은 모든 면이 균일하게 평평하지는 않아서, 책상다리를 그에 맞게 각각 조정하다 보면 왠지 모를 기울어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울어짐에 민감한 것은 나의 강박적 성격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나의 유일한 신체적 콤플렉스에서 유래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작은 하관을 물려받은 나는 남들보다 큰어금니 4개가 부족하고 그럼에도 치아가 자라날 공간이 부족해 부정교합이 생겼으며, 비뚤어진 송곳니 때문에 반대편 턱관절이 영향을 받아 턱관절 연골이 마모되어 결과적으로 하관이 비뚤어진 얼굴을 갖게 되었다. 비뚤어졌다는 표현이 심히 부정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에, 나는 기울어졌다는 표현을 종종 쓰곤 한다. 다행히도 나는 자존감이 낮지는 않아서, 기울어진 얼굴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는 편이다. 그래서 강박적인 성격과 안면 비대칭이 결합했음에도 끔찍한 자기혐오가 아닌 사물에 대한 어떤 민감성을 낳는 정도로 그칠 수 있었다고 믿는다.
기울기에 민감한 성향은 세상을 바라보고 느끼는 방식의 척도로 기울기를 사용하게 한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기울기가 있다고 믿는다. 이때의 기울기란 수준기로 측정하는 평평함의 정도라기보단, 저울의 팔이 오르내리는 정도로 느껴진다. 말하자면 고정된 기울기보다는 기울어지고 있는 느낌이랄까. 나는 이 기울어짐의 느낌을 나의 하루를 측정하는 데 사용한다. 나는 어떤 하루를 보냈는가. 얼마큼 기울어진 하루를 보냈는가.
기울어진다는 것은 무엇인가가 움직였거나 움직이고 있음을 뜻한다. 아래쪽에 무언가가 고여 있게 될 것임을 뜻한다. 그리고 그 기울어짐이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그런 순간은 격랑을 일으키는 어떤 변곡점이 아니다. 평평했던 시소가 조금씩 기울어지기 시작할 때처럼, 차라리 평평함에 가까운 순간이다. 평평함에서 기울어짐으로 이행하는 미세한 힘이 느껴지는 그런 순간. 아무 일 없는 평평한 하루 같아도, 그런 순간들은 늘 있다. 그런 찰나의 기울어짐을 느낀 하루의 끝은 언제나 꽤 많은 것들이 고여 있곤 한다. 나는 그런 하루를 잘 지낸 하루라고 말한다.
오늘은 애인과 산책을 했다. 집에 틀어박혀 앉아만 있지 않고 평소와는 다른 하루를 보낸 것이다. 요 며칠간 지나치게 평평하기만 한 하루를 보냈기 때문이다. 아마 어젯밤 냉장고 문을 열다 기울어진 김치통이 쏟아져 온 주방이 백김치 폭탄을 맞은 것은 평평한 하루와 기울어진 의자에 대한 징벌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산책을 갔던 것이다. 오늘은 날씨가 좋았고, 동네 곳곳을 구경했으며, 오는 길에 찹쌀꽈배기와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오늘의 기울기로 미루어보건대, 오늘은 잘 지낸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