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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장 Apr 17. 2016

첫 잔, 에스프레소

어른의 맛

   혀에 닿으면 쓰고 떫었으며 넘어가고 나서는 시었다. 타이어와 크레파스를 정성스럽게 녹인다면 이런 맛 일까 싶었다. 대체로 어른의 맛이라는 게 접하기 전에는 우아하고 품위 있어 보이지만 그 첫맛은 괴로웠다. 그럼에도 녹지 않은 설탕의 묵직한 단맛이 도착하면 지나간 쓴맛이 아쉽기도 하고 그립기도 하다. 이렇게 결국 중독되고 말았다.


지름이 손가락 길이보다 짧아 보이는 작은 찻잔이 나왔다. 컵 받침 위에는 찻수저와 각설탕 한 개가 놓여 있었다. 이 작은 잔을 데미타세라 했다.


  "이 쓴걸 왜 먹는 거죠?"


실제로 에스프레소를 시키는 사람이 있을 줄 몰랐다. 누군가는 마시기 때문에 있는 것이겠지만 직접 본 적은 없는, 마치 도시괴담 같은 것이었다. 가장 익숙하지만 낯선 커피. 메뉴판  윗줄에 쓰여있는  값싼 음료라 정체도 모르고 시키는 것인 줄 알았다. 주문을 받은 직원도 오묘한 표정으로 작은 잔에 나오는 커피 원액을 말하는 것이 맞는지를 확인했다. 선배는 항상 그것을 마셔왔다고 했다.   

  

선배는 나보다 네 살 위였지만 하는 행동을 보면 철없는 남동생이었다.  솜털을 갈아 치우고 갓 깃털을 단 스무 살. 가능성과 현실이 공존하던 대학생활에서는 현실에 가까울수록 지적인 이미지를 풍겼다. 그런 면에서 선배는 가능성에서 헤엄치는 완벽한 몽상가였다. 말하는 문장의 단어들, 현실감 없는 결정력은 내가 결코 갖지 못한 것이었다. 시험기간에 동방을 울리는 기타 소리는 선배의 것이었고 자정이 넘은 시간 불이 켜진 동방은 분명 선배였다. 훔쳐 갈 것도 없다며 자취방 문도 잠그지 않고 다니던 그는 화난 상대에겐 더 짓궂게 장난을 치는 사람이었다. 유치하기도 하고 어이가 없어 짜증이 누그러졌던 게 여러 번, 분명 선배는 핫초코를 고를 것 같은 사람이었다. 휘핑 많이.


에스프레소가 나왔다. 모나지 않은 얼굴에 둥글고 큰 눈을 가진 선배는 어른의 음료와 어울리지 않았다. 작은 잔에 담긴 짙은 검은색 음료는 끝 모를 동굴 같은 존재감이 있었다. 그 잔으로 선배가 빨려 들어가 버리지는 않을까? 기싸움을 했다면 선배는 분명 에스프레소에게 졌다. 

선배는 종이 포장을 열어 각설탕 두 개 중 하나를 잔에 넣었다. 반듯했던 각설탕의 형체가 흩어지자 한입에 털어 넣었다. 직접 마시지도 않았는데 입에서 쓴맛이 느껴져 컵받침 위에 남은 각설탕 하나를 입에 날름 넣었다.

 

세상은 고달프다. 아니, 세상이 고달프다기보다는 세상살이가 고달프다.
그 고달픔이란 쓴맛이다. 쓴맛 중에서도 아주 쓴맛.
그렇다. 어른들은 커피를 마시면서 세상의 쓴맛에 익숙해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중이었다.

-박광수[참 서툰 사람들] 커피를 마시는 이유 中


혓바닥이 오그라 들 것 같은 쓴 맛을 견디면 그 안에 단맛이 있고 상쾌한 맛이 있고 매운맛이 있다.   

믹스커피 한 봉지에 설탕을 두 스푼씩 더 넣어 마시던 내가 선배의 나이를 넘기고서야 어른의 맛을 이해한다.

아름답지 않은 것을 보아야만 하고 달콤하지 않은 것도 먹어야 함을 알게 되었다.  


감탄고토.

독성을 가진 알칼로이드는 주로 쓴맛을 내기 때문에 낯선 음식이 쓸 때는 뱉는 것이 생존 확률을 높인다. 초식 동물이었던 인류의 조상은 분자생물학에 입각한 입맛으로 위험한 쓴맛은 불쾌하고 영양가가 있는 단맛은 기분 좋게 느끼도록 만들었다. 사람이 계속 자연에서 살아왔다면 결코 쓴맛을 즐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이 쓴맛 없이 하루를 견딜 수 없다. 

달콤한 꿈을 즐겨보지도 못하고 쓴맛만 입에 머금은 채 뱉지도 못하고 진짜 어른이 되어 버렸다.

 

사는 게 항상 이렇게 힘든가요? 아니면 어릴 때만 그래요?
언제나 힘들지.

-영화 [레옹]中


  혀에 닿으면 쓰고 떫었으며 넘어가고 나서는 시었다. 타이어와 크레파스를 정성스럽게 녹인다면 이런 맛 일까 싶었다. 대체로 어른의 맛이라는 게 접하기 전에는 우아하고 품위 있어 보이지만 그 첫맛은 괴로웠다. 그럼에도 녹지 않은 설탕의 묵직한 단맛이 도착하면 지나간 쓴맛이 아쉽기도 하고 그립기도 하다. 이렇게 결국 중독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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