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쾌한 젊음의 맛
에스프레소가 조지 클루니 같은 중년의 남자를 떠올리게 한다면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젊은 여성이다. 시폰 블라우스에 검은 정장 치마 입은 여성의 손끝이 우아하다. 꼼꼼히 바른 입술에서 나오는 지적인 어휘들이 감미롭다. 그러다 별안간 소녀처럼 까르르 웃는다. 첫맛은 경계하듯 강렬하고 머금으면 향기롭고 삼키고 나서는 가볍게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경쾌하게 웃는 아가씨의 손이 차서 덥힌 손으로 감싸 쥔다. 스치듯 헤어져 아쉬운 마음에 다시 한번 한 모금 마신다.
소개팅에 늦는 것만큼 첫인상을 구기는 일이 있을까.
예쁜 날씨였던 5월 주말, 여자는 먼저 들렀던 예식장에서 늦게 출발하는 바람에 소개팅 장소에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하게 되었다. 약속시간이 지나기 전 미안하다며 보낸 문자에 남자는 시원하게 괜찮다고 답했고 여자는 미안함을 조금이나마 줄이고자 열심히 달렸다. 부드러웠던 날씨는 곧 끈적하게 들러붙는 땀을 내고 예쁘게 차려입은 옷과 머리는 끌려온 역적 같이 되었다. 여자는 거울도 보지 못하고 남자를 찾으며 마음으로는 이미 망했다를 외쳤다. 그때 남자가 내민 것이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다. 여자는 청소기 같은 숨을 들이마시면서 얼음이 가득 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받아 들었다.
첫 만남에서는 따뜻한 음료를 마실 때 상대에게 더 호감을 느낀다고 한다. 음료를 잡은 손이 따뜻해져 상대를 더 부드러운 사람으로 보기 때문이라 했다. 그런데 이렇게 건네주는 게 찬 음료라고 어찌 호감을 떨어트릴 수 있을까? 기분 좋은 서늘함이 손끝에서 혓바닥으로 식도를 타고 넘어간다. 머리 끝까지 찬기운이 번지면 그 배려가 얼마나 따뜻한지 한껏 덥힌 피가 양볼에 비친다.
영화처럼 둘은 사랑에 빠지고 행복해야겠지만, 소개팅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그날 늦은 시간 나를 만난 친구는 그 남자가 얼마나 매너가 있는지, 배려심이 넘치는지 이야기했지만 그게 다였다. 우린 아름다웠던 만남을 마무리 짓기 위해 고르고 고른 단어로 남자에게 문자를 남겼다.
당신이 얼마나 멋지고 좋은 사람인지를 알지만 우린 맞지 않는 것 같다는 뻔한 통보.
그래도 그는 커피에 자신을 새기고 떠났다. 아마 친구는 후텁지근한 날씨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손에 쥐면 종종 그 남자가 떠오르지 않을까? 얼굴도 본 적 없는 나에게도 이렇게 남아있는데.
시원한 바람과 따뜻한 해가 머리 위에 있는 시간, 사원증을 목에 건 여자들이 치맛자락을 살랑대며 삼삼오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걸어간다. 까만 스타킹이 없는 차림에 봄이 완연함을 느낀다. 주변 공기를 꽉 채우는 대화와 웃음소리들이 여자들을 따라간다. 투명한 컵에 꽂힌 빨대에 꽃 같은 립스틱들이 찍혀 있다. 봄은 저들이 데려온 것 같다. 봄을 지낸 어린 성인들, 그녀들의 경쾌한 발걸음에 곧 여름이 따라올 것이다.
내 유년기의 태양은 저물어버렸다. 아마 여러분도 아시리라, 어느 여름날 해 질 무렵 꽃이 만발한 산울타리와 작은 날벌레들 위에 잠시 머무르는 향기로운 빛, 혹은 산책길 어느 언덕 밑에서 문득 만나게 되는 마지막 햇살, 그 솜털 같은 온기와 황금빛 날벌레들을.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롤리타] 中
에스프레소가 조지 클루니 같은 중년의 남자를 떠올리게 한다면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젊은 여성이다. 시폰 블라우스에 검은 정장 치마 입은 여성의 손끝이 우아하다. 꼼꼼히 바른 입술에서 나오는 지적인 어휘들이 감미롭다. 그러다 별안간 소녀처럼 까르르 웃는다. 첫맛은 경계하듯 강렬하고 머금으면 향기롭고 삼키고 나서는 가볍게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경쾌하게 웃는 아가씨의 손이 차서 덥힌 손으로 감싸 쥔다. 스치듯 헤어져 아쉬운 마음에 다시 한번 한 모금 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