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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장 Apr 20. 2016

세 번째 잔, 차이 티 라떼

새끼 고양이의 맛

밀크티를 생각하고 마시면 생강향에 깜짝 놀란다. 달착지근한 우유가 부드럽게 지나가고 나면 묵직하게 혓바닥이 아리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뱃속부터 뜨뜻한 열기가 올라온다. 술처럼 뜨거운 돌을 삼킨 느낌이 아니라 뭉근하게 끓이는 죽 냄비다. 온기에 노곤해질 때쯤 홍차의 카페인이 열을 식혀준다. 변덕이 심한 고양이 같은 음료다. 겁 없이 안은 고양이의 발톱에 긁혔는데 제 발톱에 난 상처를 가칠한 혀로 핥아준다. 그 매력에 다시 한 모금 마시게 된다.


작년 3월 첫 주, 제주도에 있었다.

스타벅스 스탬프 투어 때문에 연구실 직원들끼리 경쟁이 붙어있었다. 다이어리에 공지된 열두 지점에서만 찍어주는 도장을 모두 모으면 선물을 받을 수 있었다. 어떤 상품인지는 비공개였고 단지 특별한 선물이라 했다. 서울, 부산, 진해, 경주, 문경, 제주가 있었는데 마침 11월에 부산에서 학회가 있었던 터라 모두 한 마음으로 송정 비치 점과 해운대 달맞이점을 오가며 하루에 두 잔씩 커피를 마시고 도장을 채웠다. 그리고 다음 해 3월까지 아무도 도장을 늘리지 못 해서 동점이었다. 그때 내가 제주도행 티켓을 끊었다.


제주도에서 만난 사람들은 내가 "스타벅스 도장 찍으러 왔어요."라고 대답하면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죄송하지만 그 설마가 맞다. 나는 유난히 사행성이 첨가된 것들에 약했다. 길거리에 인형뽑기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고 다트를 던지는 게임은 상품을 받을 때 까지 했다. 운이 좋았는지 기술이 좋았는지 항상 소정의 성과가 있었기에 내기와 상품이 있다면 이유 불문, 최대한 빨리 끝내는 것이 목표였다.
목적이 무엇이든 즐거우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그렇게 무작정 출발했다. 목요일 퇴근 후 바로 비행기를 타서 먼저 도착해있던 친구를 만나 게스트 하우스로 향했다. 친구가 예약한 게스트 하우스는 이름만큼 뜨거운 곳 있었다. 혼자라면 가지 않았을 테지만 추천하는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믿었다.

가파른 언덕을 올라 입구에 들어서자 질서 없이 놓인 테이블마다 막걸리와 만두피를 찍어낼 때 쓰는 것 같은 스테인리스 잔들이 놓여 있었다. 이미 술자리가 한창이었다. 


내일이 형 결혼식이라 오늘이 제주도 마지막 날이라던 남자.

가구를 만든다던 어린 학생.

몸이 안 좋아 일주일 휴가를 몰아 쓰고 내려왔다던 여자.

안경테 다리에 여자친구의 이름을 새겨둔 남자.


막걸리는 달콤했고 누군가는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뜨문뜨문 노랫소리도 들려왔다.

부족한 안주에 낯선 사람들이 부엌에서 정체모를 음식들을 만들어 내왔고 가방에선 초콜릿들이 나왔다.

한두 명씩 잠자리에 들자 남은 사람들은 테이블 하나로 모였다.

막걸리가 떨어지고 노랫소리는 커졌다.


스타벅스 성산일출점


시끌벅적한 소리에서 잠들어 고요함에 눈을 떴다. 앞바다의 파도는 부드러웠고 비는 가볍게 내렸다.

테라스에 혼자 있던 남자는 기타를 치며 노래 불렀다. 낯선 멜로디에 지금 보이는 풍경들이 담겨 있었다. 제주도를 위한 노래.


족장님이라 부르는 게스트 하우스 주인분이 큰 주전자에 차를 끓여오셨다. 부스스 일어난 사람들은 씻지도 고 잠이 덜 깬 눈으로 차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다들 비 오는 바다를 보고 서서 마셨다. 꾀죄죄한 사람들이 미어캣처럼 서서 차를 마시는 것이 지나가는 사람이 보기에 썩 좋은 풍경은 아니었겠지만 각자의 시간은 품격 있었다.

 

게스트 하우스 앞 바다. 


차는 낯선 맛이었지만 일단 손이 따뜻해 좋았다. 색은 진한 밀크티였는데 입에 머금으니 생강향이 났고 그 뒤로 우유 맛이 불쑥 밀고 들어왔다. 마지막에 꼬리처럼 홍차 향이 살짝 풍겼다. 달착지근한 맛에 후루룩 마셨더니 혓바닥에 진동을 울리는 것처럼 아렸다. 그 아린 맛이 뱃속까지 뜨끈하게 덥혔다. 따뜻한 볼에 찬바람이 스치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차를 다 마셨는지 다시 기타를 잡은 남자는 조각을 하듯 노래했다.  

빗소리, 파도소리, 기타 소리 그리고 노랫소리


", 인도에서 마셨던 거랑 똑같아. 거긴 흙으로 빚은 잔에 마시고 바로 옆에 던져서 이렇게 깨진 컵이 쌓여있어."


친구를 갠지스 강으로 보내버린 그 음료는 차이를 우유와 함께 달게 끓여낸 차이 티 라테였다. 인도를 떠오르게 하는 이 맛이 내겐 제주도의 포인트가 되었다. 봄비가 내렸던 제주도의 앞바다.   


보랏빛 끈은 한 토막의 이야깃거리로만 보였지. 내 인생의 의미와 운명을 이루는 것들을 다른 사람들은 차를 마시거나 저녁을 먹으면서 간단히 입방아 찧을 수 있는 법이거든.
-산도르 마라이 [결혼의 변화] 일롱 카 中


밀크티를 생각하고 마시면 생강향에 깜짝 놀란다. 달착지근한 우유가 부드럽게 지나가고 나면 두툼하게 혓바닥이 아리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뱃속부터 뜨뜻한 열기가 올라온다. 술처럼 뜨거운 돌을 삼킨 느낌은 아니다. 온기에 노곤해질 때쯤 홍차의 카페인이 열을 식혀준다. 변덕이 심한 고양이 같은 음료다. 새끼 고양이를 겁 없이 안았다가 양칼진 발톱으로 긁혔는데, 미안했는지 혀로 핱아준다. 그 매력에 다시 한 모금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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