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근처에 오래되고 유명하고 큰 제과점이 있다. 엄마는 늘 그 곳을 지날 때마다 “나는 오늘도 세상을 이겼노라.”고 했다. 몇 차례 패턴이 반복되자 그 말의 의미가 궁금해졌다. 엄마는 “저렇게 돈 많은 곳은 이미 잘 먹고 잘 사니 본인까지 도와줄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 억지스러운 엄마의 논리에 말문이 막혀버렸지만 그 후 나는 그 제과점에서 빵을 살 때마다 괜스레 엄마를 배신하는 느낌이 들곤 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야말로 세상에 그냥 바로 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세상과 싸우는데 관심이 일도 없고, 만약 그렇다 해도 왜 이겨야 하는지조차도 모른다. 내 기준에 물건은 나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들에 불과할 뿐, 물건 하나로 굳이 전쟁까지 소환할 만큼 장엄한 마음가짐을 가져야하는 건 더더군다나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후로도 지켜본 바에 따르면 엄마는 내가 온라인으로 광고를 보고 필요해 보이는 청소 도구나 아주 미세한 도움을 주는 주방 도구들을 구매하려고 할 때마다 그놈의 ‘세상과의 전쟁’ 타령을 했다. 기껏 일 이만 원 안짝의 것들을 주문하면서 세상과의 싸움을 준비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 아예 쇼핑 욕구 자체가 싹 사라졌다.
나는 오늘도 당근으로 물건을 내놓으려고 이리저리 찬장을 뒤적여 본다. 찬장 속에서 텀블러, 도시락통, 죽통, 유리 물통과 물통 케이스가 나왔고 신발장에서는 한 번도 신지 않은 젤리 슈즈, 아찔한 하이힐, 발에 맞지 않아 처박아둔 부츠와 똑같은 디자인과 모양의 로퍼들이 쏟아졌다. 옷장은 차마 열어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우선 먼저 이것들을 당근에 올리기 위해 문구를 작성한다. 물건들을 올리고 보니 “한 번도 신지 않은 xxx, 딱 한 번 사용한 xxx, 새 것과 같은 컨디션에 보관만 함”이라는 문구들이 자꾸 겹친다. 그리고 판매가격을 정하기 위해 정가가 얼마였는지 한번 검색해 보고는 화들짝 놀라 나도 모르게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세상과 전쟁’을 하지 않은 자가 숨어있던 세상이란 적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어릴 적 개성이 강했던 작은 소녀는 오래된 못생긴 도시락통, 어디서 받아온 우산들, 은행에서 받아온 수건들, 언니에게 물려받은 헐렁한 속옷과 양말, 생활의 흔적이 가득 묻은 소품들로만 채워진 실망스러운 일상을 보냈다. 친구들의 예쁘고 새 물건들을 속으로만 한껏 부러워만 하면서. 그래서였을까, 돈을 벌고 나자 나는 작고 보이지 않는 소소한 것들에 한껏 돈을 썼다. 새로운 도시락통, 반찬통, 과일통, 간식통, 약통 등 각종 휴대용 통들을 모으고 온갖 종류의 물병들, 파우치, 우산, 필통, 여행 용품, 속옷 등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부분에 관한 물건이라면 더욱 집착적으로 말이다. 덕분에 어느 순간, 나의 눈이 머무는 곳에는 전부 예쁜 것들로만 가득 채워지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모른 것이 있었다. 예쁜 소소한 것들이 내 눈을 가리는 동안 세상이 내 뒤로 내 인생을 빼가고 있었다는 것을. 숨어있던 세상은 내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자 본성을 드러내고 계산기를 두드리더니 자신의 몫을 싹 가져가 버렸다. 그러자 비로소 남은 것들이 보였다. 오랫동안 그러모은 엄청난 양의 예쁜 것들은 이사를 하면서 한쪽이 깨지거나 부속품들이 없어져 버렸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문제는 이런 자잘자잘한 것들을 넣어둘 곳은 커녕, 나는 집도 절도 없다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애써 모은 것들을 또 애써 버리거나 팔아야 했다. 오늘도 나는 새것 같은 물병 하나를 팔고 오면서, 이 물병은 내 잃어버린 인생의 어떤 조각이었을까 생각해 본다. 매달 집을 사기 위해 매달 붓던 적금이었을까? 아니면 팔아버린 차의 뒷 문짝의 어디쯤일까?
물건들이 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 곳 바위 위에 해초같이 제멋대로 엉켜버린 내가 걸려있다. 일어날 기력은 아직 없으니 누운 김에 대(大)자로 뻗어 실컷 해나 쬐어야겠다. 나는 전쟁인지도 모르고 얼떨결에 참전해서 부상을 입은 용사 아닌가. 그러니 치료도 좀 받고 쉬어야겠지. 그러고 나면 이제 엄마 눈에만 보이던 세상이란 전쟁터가 보이고 전쟁에 대비해 작전을 짜고 무기를 준비할 것이다. 그러니 세상이 듣는다면 긴장하는 게 좋을 것이다.
나는 두 번은 안 당할 것이다. 기다려라, 세상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