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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ice Oct 11. 2024

Brunch 말고 Crunch

제일기획에만 있는 몇 가지 2. 크런치 타임 (Crunch time)

창의성이 최고 미덕


광고대행사에서 일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능력을 딱 하나 꼽으라면
그건 바로 

"크리에이티브한 아이디어"


늘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려야 하고 

세상에 없던 아이디어로 광고주를, 소비자를 놀라게 (?) 해야 하는 일.


물론 재미있고 즐거운 작업이지만

늘 새로운 무언가를 생각해 내는 일은 고되고 어려운 작업이다. 

말랑말랑한 뇌에서 최고의 아이디어가 나온다는 이야기!

아이디어가 정해진 업무 시간에 "똭" 하고 생산되지는 않기에 

제일기획은 2009년 새로운 제도를 만들었다.


11시 30분 ~ 1시 30분까지 점심시간 2시간


그 당시 매우 파격적인 이 제도는 

구성원의 아이디어 발상을 위한 시간을 주기 위해 시작되었는데 

이는 단순히 점심시간이 2시간으로 늘어난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크런치(Crunch Time)란?


크리에이티브(Creative) + 런치(Lunch)

크리에이트브와 런치가 합쳐진 크런치는 

"크리에이티브 발굴을 위한 2시간의 긴 점심시간"을 의미한다.

2시간의 점심시간은 제도적으로 정해진 시간이기에

빠르게 점심을 먹고 헐레벌떡 돌아올 일이 없다. 


120분의 자유로움과 여유

크런치는 나에게 이런 의미였다. 


연차를 내고 가야 할 병원 진료도 점심시간을 이용해 다녀올 수 있고

리움에서 전시를 보고 산책도 여유 있게 

팀원 모두 영화를 보러 가기도 하고 

영어공부, 헬스, 요가, 필라테스 등.. 

다양한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책상 앞에 오래 앉아있다고 아이디어가 샘솟지는 않기에

2시간의 크런치는 유연한 광고대행사의 문화를 보여주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물론,

언제나 크런치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점심시간은 지하식당에서 15분 만에 해결하고

빠르게 올라와 다시 제안서를 쓰고 

밤늦도록 야근을 했으니 말이다. 




왜 만들었을까? 

광고대행사는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업무가 거의 없다. 

일하는 프로세스는 비슷하겠지만 

모든 광고주의 브랜드가 처한 상황은 

각자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최적화된 아이디어를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떠올려야 한다. 


실행을 전제로 하는 캠페인 제안의 경우

실제로 진행가능한 아이디어인지 사전에 체크한 이후 광고주에게 제시한다. 

허무맹랑한 아이디어만 가득한 제안은 광고주에게 팔려도 

실행불가능한 쓰레기(?)가 되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실행을 위한 현실 가능성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해야 하는 현실


새롭고 실행가능한

크리에이티브하지만 소비자 공감을 이끌어내는

최고의 브랜드 경험을 선사할 아이디어  


이런 일을 매일, 매 순간 해야 한다. 

점심시간 2시간이라도 회사 밖 신선한 공기를 쐬고 

땀 흘려 나의 몸에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 만든 제도였을 거고

꽤 오랜 시간 지속되고 있다. 

이후에 제일기획의 크런치와 비슷한 제도를 만든 회사도 많아졌다. 




나의 크런치

돌이켜보면 나도 이 시간에 참 많은 것들을 경험했다. 


2시간 동안 쓰러져 낮잠을 자보기도 하고 

남산을 쭈욱 돌아보며 달아오른 뇌를 식히기도 했다. 

꽃을 꽂고 만지며 아름다운 것에서 힐링도 해보고

2시간 내내 브런치와 수다를 즐기기도 했던 것 같다. 

때로는 시간을 들여 맛집에도 가고

점심회식을 하기도 했던 시간.. 


지나고 보니 

점심도 거르며 일하던 날도 많았지만 

2시간 동안 여유롭게 무언가에 집중할 수 있었던 그 시간들도 

꽤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치열하고 빠르게 돌아가는 그곳에서의 

잠깐의 여유. 

 

나에게 작고 소중한 자유를 선물해 준 크런치 2시간.

언젠가 나의 회사를 만든다면 

나 역시

꼭 점심시간은 2시간, 

뭘 하든 자유로운 시간을 만들어 나부터 열심히 즐기기로 맘먹었다. 




내 인생의 크런치 타임


20년 넘게 내가 가진 에너지의 총량을 다 써버린 탓인지

가끔은 예전 같은 열정은 사라졌다고 느낀다. 

열정을 다해 일했기에 지금은 기운이 빠져버린 건지..

나이가 든 건지 알 수 없지만.. 

내가 가진 에너지의 대부분을 활용하는 과정에서 

크런치와 같은 유연함을 지닌 제도는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인간의 에너지 총량은 정해져 있고 

선택과 집중을 통해 어떤 곳에 에너지를 쏟을지 항상 정해야 한다던데..

나는 광고대행사에서 광고 언저리의 일들에  

나의 20대와 30대, 40대 중반까지 거의 대부분의 에너지를 쏟았다. 

그리고 퇴사했다. 

나의 인생에서는 지금이 바로 

크런치와 같은 시간이라 생각된다. 

잠시 머리를 식히고 훨씬 더 크리에이티브한 인생을 살기 위한 잠깐의 여유로운 휴식. 


크런치 이후의 오후 업무가 조금은 가벼워졌던 것처럼 

나의 인생 크런치 이후의 삶은 

좀 더 가볍고

새로워지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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