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가 크면 실망은 더 크다.
유례없던 긴 연말휴가 후 출근한 회사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여러 층을 사용하던 사무실 공간이 줄어든
새로운 분위기의 사무실.
반으로 줄어든 전체 직원 수.
(AE와 제작인원 일부만 남았다.)
무엇보다 나 역시 이제 종합광고대행사 소속이 아니었다.
새로운 뉴미디어 자회사의 디지털 마케팅 담당
업무는 같았지만 그룹 내 신규사업을 위해 새롭게 만들어진 회사 소속이다.
12월 31일 퇴사
1월 2일 입사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함께 같은 일을 계속한다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갑자기 바뀐 상황에 당황할 시간도 잠시,
내가 맡은 광고주 업무는 규모감 있는 신규브랜드의 런칭으로 바쁘게 돌아갔다.
나 역시,
정신없이 일하며 흘러간 시간...
어느새
선배들이 하나둘 다른 대행사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정신없는 캠페인을 끝까지 마무리하다 보니
어느새 우리 팀에 기존멤버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격동의 시기를 함께 보냈지만
좀 더 좋은 환경에서 광고를 하고 싶은 맘은 모두 같았다.
어느 순간
모두 헤어져야 함을 알고 있었으리라.
대행사 소속이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광고를 하긴 쉽지 않았기에..
그즈음 나는
내가 맡고 있던 클라이언트의 경쟁사 담당으로 오퍼를 받았다.
통신사 k의 대대적인 브랜드 캠페인이 새롭게 진행되던 시점,
우리 팀선배들과 AE, 회사 전체가 해당 프로젝트에 집중하여 캠페인을 기획했고
성공적인 런칭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도 디지털 마케팅의 최전선...
너무 힘들고
매일 지치고
늘 아슬아슬한 클라이언트였지만
어느새 나의 내공도 꽤 쌓여있었다.
그렇지만
늘 부러운 경쟁사 캠페인.
'어떻게 저런 아이디어를 내지? 어떻게 광고주가 저걸 샀을까?'
'대행사는 어떤 생각으로 저런 캠페인을 진행하는 걸까?'
운명처럼
또다시 나에게 기회가 왔다.
인생은 가까이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이 있다.
나에겐 2번째 종대사가 딱 이런 느낌이었다.
그렇게 좋아 보이던 광고주와 그 광고주를 메인으로 하는 하우스 에이전시
궁금했고 배우고 싶었던 캠페인을 쭉쭉 뽑아내던 곳
그곳에 입사했다.
이제 나는 대한민국 양대산맥 통신사의 캠페인을 모두 경험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처음부터 이곳의 광고를 진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종대사.
메인 클라이언트가 정해져 있다 보니
당연히 하우스 에이전시에서 대행을 잘하고 있고
하우스 에이전시가 갖는 장점을 발휘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
이러한 조직을 직접 경험하니
밖에서는 좋아 보이기만 했던 장점 대신
"이런 문제가 있다고???"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존재 자체를 증명해야 살아남는 대행사.
왜 당신들에게 대행을 맡겨야 하는지를 매번 증명해야 하는 일
생각지도 못했던 일에
너무 많은 에너지와 기운을 소진하고 있는 현실
그런 이유로 클라이언트와의 관계가 더 힘들어지며
조금씩 지쳐갔다.
돌아보면
하나의 브랜드를 메인으로 담당하며 더 깊숙이 한 브랜드를 팔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그렇지만 대행사를 고집했던 이유는
매번 새로운 광고주의 새로운 브랜드를 만나고 관계를 맺고
마이 브랜드로 캠페인을 담당하는 그 일이 정말 재미있어서였다.
(사실 질리지 않고 하나의 브랜드를 깊이 팔 자신이 없기도 했다)
형체가 없는 통신사를 오래 담당하다 보니
실체가 있는 제품, 식음료 등의 소비재..
아직 경험하지 못한 다른 브랜드들이 궁금해지던 찰나
나의 선배, 멘토, 나의 영원한 팀장님이
나를 부르셨다.
"00아~ 와라 이제..
여기 와서 다시 같이 일하자"
이 선배와 했던 약속이 있었다.
팀장님이 부르시면 그게 어디든 한 번은 무조건 그냥 갑니다.
그 어떤 대행사든..
스타트업이든..
1인 기업이든..
딱, 한 번은 다시 일할 기회가 있길 바랐던 맘이다.
미련 없이 사표를 냈다.
선배가 날 부른
그곳이 바로
내가 다닌
나의 마지막 종합광고대행사
내가 대학시절 광고공모전 접수를 하며
일하고 싶다는 강한 맘이 생겼던...
이태원
그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