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기획에만 있는 몇 가지 1. 제일러(Cheiler)
몇 번의 이직을 통해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담당하는 광고주의 취급고가 점점 더 커졌다는 것이다.
광고비를 크게 집행할 수 있는 브랜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기업
세상에 없던 신규 브랜드의 엄청난 런칭 캠페인들..
이전까지 나는 크고 다양한 광고주를 가진 대행사는 모두
그만큼 잘 갖춰진 시스템 안에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거대한 조직을 움직이기 위해 빈틈없이 잘 갖춰진 시스템이야말로
50년 넘는 역사를 가진 제일기획의 기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일기획의 저력은 직접 구성원이 되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하기 힘든
그 무언가가 바탕에 깔려 있었다.
제일기획은 이들을 "제일러"라 부른다.
조직마다 구성원을 일컫는 호칭이 있다.
이름이 갖는 결속력은 참으로 대단해서
요즘은 인플루언서들도 구독자 애칭을 정하고 그들만의 커뮤니티를 만들어 낸다
제일기획은 '제일러'라는 단어로 구성원을 표현하는데 구글러처럼 제일기획 다니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 제일러들은 "000프로"라는 호칭으로 서로의 명칭을 부른다.
지금은 흔한 표현이 된 '프로'라는 말이
11년 전 이제 막 조직에 합류한 나에게는 참으로 어색하고 입이 잘 붙지 않았다.
김프로, OO프로, 프로님~
직급과 연차에 상관없이 모두 '프로님'으로 통칭되는 이 키워드는 묘한 매력이 있다.
만나본 적 없는 사이지만 OO프로님~ 으로 시작되는 메일을 받는 순간
우리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함께 일하는 동료가 된다.
각자의 전문 분야에서 한 명 한 명 프로답게 일하는 구성원이자
직급에 상관없이 아이디어를 내고 토론하는 수평적인 조직.
팀장이 되고 나서는 'OO프로님' 보다 '팀장님, OO팀장'으로 더 많이 불렸는데
사실 난 'OO프로님'이라고 불리는 게 더 좋았던 거 같다.
후배들과 아이디어를 나누고 팀과 직급의 경계 없이
함께 일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몇 천명의 프로가 모여 이뤄진 제일기획은 경쟁 PT 승률이 매우 높다.
이전 대행사에서 일할 때도 경쟁 PT에서 늘 피하고 싶던 대상이었다.
대한민국 1등 종대사니까 당연한 결과이고
우수한 영업력으로 광고주와의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상황,
무엇보다 광고 물량을 기반으로 형성된 막강한 매체 파워...
이런 여러 가지 들이 제일기획을 늘 경쟁 PT에서 승리하게 하는 거라 생각했다.
막연한 나의 추측은
입사하고 처음으로 경쟁 PT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보기 좋게 빗나갔다.
여긴 그냥 구성원 한 명 한 명이 최고다.
OO프로 한 명이 가진 업무 역량이 단연 최고 수준이고
하나같이 열정이 넘치는 모습인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여 같은 목적을 가지고 일한다.
각자 해야 할 일을 엄청난 책임감으로 하나같이 잘한다.
이러한 업계최고 프로들이 많다.
그뿐이다.
광고대행사는 수도 없이 위기상황이 발생하는데
뛰어난 인재가 곳곳에 산재되어있다 보니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위기상황에 대처가 가능하다.
Plan B 뿐만이 아니라, Plan C, Plan D, Plan E...
어떤 문제든 해결 가능하고
빠르게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자가 발에 치이는 곳이었다.
기본적으로 광고가 좋아서 일하는 사람들..
각자의 전문성 역시 최고인 '프로' 다.
이런 사람들로 구성된 조직이 최강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을
처음 경쟁 PT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매우 빠르게 간파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이곳에서 나 역시 '프로'가 되어야 살아남겠구나.
그리고 꼭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프로'가 되어야지.
입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금은 '최인아 책방'을 하고 계신 최인아 부사장님이 회사를 떠나셨다.
워낙 존경받는 분이자, 모두의 롤모델이신 대선배님이셔서
나 역시 입사를 위한 인터뷰 전날
그분을 만나길 기대하며 잠을 설쳤던 기억이 난다.
면접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내 이야기에 온화한 미소와 응원을 보내주셨던 대선배님.
그해, 연말
29년의 제일기획 생활을 뒤로하고 퇴사를 결정하셨고
대선배님을 그냥 보낼 수 없던 후배들이 회사 지하의 식당에 모여 환송회를 준비했다.
나는 최인아 부사장님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관계는 아니었지만
그날의 뭉클함과 가슴떨림은
제일기획 사람들을 이해하기에 충분했다.
웃고 울며 저마다 최인아 부사장님과의 추억을 떠올리기에 바쁜 모습
한 명 한 명 후배들을 포옹하며 다독여주신 따뜻한 분
줄을 서서 사랑하는 선배님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던 후배들
하나같이 눈물을 흘리며 다음을 기약했다.
지금까지도 이날의 감정과 분위기는
내가 제일기획 사람들, 제일기획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다.
치열하게 광고를 사랑하신 선배님,
그 선배님과 일하던 순간이 영광이었다고 말하는 후배들,
나의 선배도 어느새 펑펑 울고 있었다.
그날의 나는 시큰해진 코끝이 기억나고
함께 회의하고 일하던 때를 떠올리며
마지막을 서럽게 슬퍼하던 그들의 모습을 보며
참 많이 부러웠던 것 같다.
광고대행사는 광고주의 일을 한다.
그래서 늘 조금은 숨겨져(?) 있기 마련인데
이슈가 된 성공캠페인은 늘 브랜드가 주인공이고 광고주가 주목받는다.
(실제 캠페인을 만들어낸 대행사를 궁금해하는 건 업계 사람들 정도)
브랜드의 성공을 위해 밤낮없이 일하고
뭐든 만들어 내야 하는 사람들
광고주를 설득하고 달래고, 답을 만들어 내야 하는 일을
끝도 없이 계속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광고대행사...
모든 조직이 그러할 테지만,
제일기획을 움직이는 것은 사람이다.
제일기획이 진행하는 최고의 캠페인은 한 사람 한 사람 최고인 '프로들'이 만들어 낸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선배, 후배, 동료들과 일하면서
다양한 제일기획 프로들과 함께
치열하게 일하며 느낀 가장 중요한 사실이자,
앞으로도 늘 마음에 지녀야 할 마음가짐.
결국, 광고는 사람이 사람에게 하는 이야기다.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한 광고는
광고대행사의 사람들.
제일기획 프로들의 피땀눈물에서 비롯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