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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든기억 깨우기 Jun 14. 2020

마지막 손님

다 내려놓았다. 스스로 모든 걸 내려놓고 새로운 부서로 발령을 받았다. 직장 동기들은 황당한 짓을 했다고 가십거리가 되었지만 나름 후회 없이 새로운 부서에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잘했다 못 했나를 되놰여보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고 잘한 일이다 마음먹고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된 것이다. 생각보다 쉽지는 않았다. 아는 척하던 선, 후배와 인사하는 사람들도 줄어들었다. 하지만 매일 승리해야 하는 회의와 의사결정, 반듯하게 차려입고 웃으면서 상대방을 설득해야 하는 세련된 대화의 기술로 고민할 필요도 없어져 뱃속은 편해졌다. 아직은 서툴지만 오래 다니던 직장생활 후의 생활도 준비해야 되고 조금은 더 성장해야 하는 아이들의 장래도 준비해야 하는 변하지 않은 바쁜 일상의 연속이다.     

 오늘은 친한 친구들과 회식을 하고 우르르 물려가는 2차를 뒤로하고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한 방향으로만 부는 겨울바람이 매몰차게 등을 밀어붙이는 거 같아 바람마저 야속한 밤이다. 어색한 회식의 술기운인지 쌀쌀한 겨울바람 덕인지는 모르지만 어두운 겨울밤 집 앞의 훤한 국숫집이 눈에 들어왔다. 늘 집안에 사람들로 북적이는 국수집이라 한번 가보고 싶어 10시에 문을 닫는다는 문구가 보였지만 잠시 고민을 하다 들어갔다. 평소에는 밤에 출출해도 어지간해서 음식을 먹지 않지만 술 한잔하면 가끔 뜨끈한 국수가 생각 날 때가 있다. 국수를 가끔 먹는 건 친한 직장 선배 덕에 생겨난 습관이다. 유독 맥주를 좋아하던 직장 선배는 술 한 잔씩 하고 집에 갈 때면 허름한 버스 분식집에 가서 국수 한 그릇과 김밥을 사주시곤 했다. 선배도 이제 정년을 1년여를 남기고 있다. 처음 봤을 때가 30대 초반 이였으니 얼추 30년이 다 돼가는 인연이다. 퇴근 하는 길에 일주일 몇 번씩 전철역 앞 허름한 호프집에 늘 앉아계시던 모습이 지금도 익숙하다. 밖이 훤히 보이는 치킨집에서 지나가는 후배들이 있으면 꼭 들어오라고 해서 맥주 한두 잔씩 꼭 먹이고 보내주셨다. 수원에서 출퇴근 하던 터라 퇴근길이 바빴지만 나도 늘 그 무리 속에 섞여 늦은 밤까지 방금 빠져나온 직장얘기를 밤새 하곤 했다. 퇴근길 산산한 바람에 곁들여지는 고소한 닭을 튀긴 기름 냄새와 시원한 카스 생맥주 한잔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쉽지 않았다. 얼큰하게 취하시면 전철역 후미진 다리 밑에 있는 버스 분식을 항상 찾아가셨다. 오래된 버스를 개조해서 만든 분식집에서는 창가에 한 방향으로 앉아 소리 없이 국수나 김밥을 먹고 있는 모습이 무척 생소하게 보였다. 어린 나에게는 마치 서울 생활의 고단함을 보는 거 같기고 하고 조용한 모습이 먼 훗날 나의 모습 같기도 해 어색하게 서 있기 일쑤였다. 선배는 익숙한 듯 자리에 앉아 끌고 들어온 후배들 인원수에 맞춰 자연스럽게 국수와 김밥을 시켰다.

“맥주 먹고 국수가 들어가십니까?”

“국수 한 그릇 먹고 가야 내일 또 열심히 일하지”

20년이 넘은 일이지만 정말로 술을 먹고 난 다음에 국수 한 그릇 먹고 나면 그다음 날 속이 편했다.      

“오늘 영업 끝인가요?”

“문 닫으려고 하는데 앉으세요”

“국수만 됩니다”

그 말에 아무도 없는 국숫집에 덩그러니 혼자 국수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괜히 들어왔나 후회도 되고 집이 바로 앞인데 그냥 들어갈 걸 하는 생각이 든다. 일을 끝낸 아르바이트 학생도 주섬주섬 옷을 입더니 급하게 나가고 주인아주머니는 덜그럭덜그럭 마무리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바쁘게 한 그릇 내주신 잔치국수가 제법 많이 들어있고 국물도 한가득 담아내 주셨다.

“천천히 드셔도 됩니다”

막상 말은 그렇게 하셨지만, 점점 빨라지는 젓가락에 마음이 급해진다.

추운 겨울날 허름한 국숫집의 마지막 손님의 행색이 나름대로 운치 있는 구성 같지만 요즘 유행하는 혼밥을 우연찮게 겪으니 예전의 버스 분식에 어색하게 서있던 그 모습과 흡사 닮아 참 못났다는 생각도 든다.

예전에 야간열차가 타고 싶어 일부러 밤기차를 예매한 적이 있다. 나름 밤기차의 낭만을 즐기려 했지만 큰 낭패를 본 적이 있다. 이유는 밤이라 밖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기차 유리창에 비친 나의 큰 얼굴만 보여 크게 실망한 적이 있었다. 그만큼 오늘 국숫집의 마지막 손님의 자격이 어색했다.

급하게 먹고 나온 국숫집, 뱃속은 뜨끈하고 든든하다. 내일은 아침에 일어나면 속은 편하고 든든하겠지. 젊어서 아무것도 모르고 선배들 따라다니며 다녔는데, 벌써 라니 말을 많이 한다. 문득문득 느끼는 허전함과 어색한 분위기가 마치 국숫집의 마지막 손님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운 겨울바람보다 생각의 허전함이 허기를 느끼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뜨끈한 국수 한 그릇으로 잠시나마 허전함을 잊었다. 생전의 아버지도 술 한 잔하고 오시면 어머니한테 국수 한 그릇 해오라고 하셨는데 아버지도 슬 한잔에 허기가 지셔서 그러셨을까?

아니면 술 한 잔하고 아무 얘기 없이 주무셨을 때는 나처럼 동네 국숫집에서 국수 한 그릇 드시고 외로운 생각을 하셨을까?

알수는 없지만 든든한 속으로 국숫집을 나오니 매몰차던 바람도 시원하다.  

집의 베란다 불빛이 선명하다. 식구들 자기전에 붕어빵 한봉지 사가지고 들어가 오랜만에 아이들 하고 놀다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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