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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든기억 깨우기 Jun 17. 2020

꼬마열차는 다시 달릴 수 있을까


“시장에서 대충 사다 먹지 어딜 또 갈려고”

“해주면 잘 먹으면서 같이 갈 것도 아닌데 잔소리 좀 그만 해요”

엄마가 소래로 새우젓을 사러 갈 때면 아버지와 엄마의 대화는 늘 이랬다. 나도 엄마의 소래 행은 별로 달갑지 않은 행사였다. 내성적이고 직선적인 누나에게는 말도 안 하고 엄마는 항상 나를 동행시켰다. 옆에 커다란 양은들통과 작은 들통 하나씩 들고 몇 년 동안 꼬신 동네 아줌마들과 수원 역을 걸어갔다. 나는 행여 동네 친구들에게 들킬까 봐 들통 부대에서 멀리 떨어져 뒤따라 가곤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소래행 협궤열차는 가을 김장철이 가까워지면 기차앞에 들통부대가 한 가득이라 우리 집 들통은 티도 안 났다. 수원역 한 모퉁이를 돌아 안쪽으로 돌아가면 꼬마 기차가 한 대 덩그라니 얼핏 서있는 모양새는 장난감 기차다. 1호선 전철과 똑같은 하얀색과 파란색으로 칠해진 외관이 세련되긴 했지만, 폭도 좁고 2량짜리 기차라 달리는 기차로 보기엔 엉성하고 장난감 모양이다. 초록색도 아니고 연둣빛도 아닌 벨벳 좌석인데 사람들이 차면 다닥다닥 붙어 앉아 의자 색깔은 거의 보이지도 않는다. 내리쬐는 오후의 햇빛은 기차 안을 훤히 밝히지만 검은 옷 천지인 사람들이 암막 커튼 인 양 가로막아 늘 어두웠고 흔들리는 사람들 사이로 쏟아지는 햇볕은 나이트의 사이키조명처럼 어지러운 게 기차 안 풍경이었다. 아줌마들은 올해 새우젓 값이 얼마인지도 궁금하고 어느 집 새우젓이 낫더라, 옆집에서 어제 왜 시끄러웠는지 쉴 새 없이 떠들면서 갔다. 나는 어두운 기차 안에서 입이 댓 발 나온 채 시간은 왜 안 가는지 눈도 감아보고 창문밖 만 늘 바라본 곤 했다.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어머니는 세련된 도시엄마가 아니었다. 웬만하면 현지 가서 직접 물건을 사 오시고 직접 손질해 집에 차곡차곡 쟁여놓고 살림을 하셨다. 어린 나를 데리고 다니시면서 혼자 우시는 모습도 몇 번 봤고 동네 아줌마들과 환히 웃으시는 모습도 많이 봤다. 소래역에 내리면 포구의 풍경을 바라볼 시간도 없다. 포구 끄트머리에 앉아 지금처럼 회 한 접시에 일상의 고단함을 녹일 시간도 없다. 곧장 최 씨 할머니네로 달려가 인사 한번 하고 양은 들통에 하나 가득 새우젓을 담고 할머니와 이런저런 얘기를 마치곤 곧장 다시 수원으로 오실 준비를 한다. 큰통은 머리에 이고 작은 들통 하나를 엄마와 나란히 잡고 다시 역으로 향한다. 올 때 봤던 사람들이 그대로다. 가뜩이나 작은 기차에 달랑 몸뚱이 하나 걸친 사람도 없다. 말끔히 차려 입은 신사도 없고 나들이 가는 식구들도 보이지 않는 기차 안이다. 비릿한 들통이나 대충 뚜껑 덮은 들통을 이고 다닥다닥 붙어있다. 간혹 터널을 지날 거 같으면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마치 지하 깊숙이 불 꺼진 탄광터널로 들어가 나오지도 못할 거 같은 암흑의 세계로 들어가 버린다. 기차는 아무리 움츠리고 조심해도 한 번 덜겅거리면 앞사람과 무릎이 서너 번 부딪히고 어깨는 어깨동무만 안 했지 바짝 붙어있는 모양새가 상자 안에 빼곡히 포장되어 있는 곶감 모양이다. 배가 고파 그럴 수도 있고 어둡고 비릿한 낮선 풍경속에 주눅이 들어 그럴지도 모른다. 엄마 손 하나 달랑 믿고 숨죽이고 웅크린 폼이 소금에 바짝 절인 새우 꼴이다. 해는 이미 저버려 깜깜한 밤에 뿌연 창가로 기차 안의 사람들의 모습이 더 도드라진 것이 반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의 그림과 흡사 하다. 어둠이 내린 수원역에 내리면 택시도 들통을 본 우리를 태워주질 않았다. 엄마와 버스를 타고 내려 힘들게 집에 오면 식은 밥 한 숟갈 허겁지겁 먹고 골아 떨어지곤 했다.     

소래행 협궤열차의 역사는 길다. 정확히 말하면 수인선이다. 1937년에 7월에 수원과 인천을 오가는 노선으로 개통되었다. 원래 목적은 일제강점기 때 소금과 곡물을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만들어진 철도다. 해방 후에는 수원과 인천을 연결하는 유일한 교통수단이 되었고 학생과 직장 상인들이 이용하는 기차가 되었다. 협궤열차의 철도 폭은 1m도 안 되는 76cm이다. 우리나라 표준 궤간이 143.5cm인데 비하면 반절도 안 되는 넓이다. 열차도 당연히 작아  덜컹거리는 늘 비좁았다. 소문엔 가다가 소가 들이받아 넘어졌다는 소리도 있었다. 1995년 12월 31일 수인선 협궤열차는 더 이상 움직이질 않았다. 이유는 저렴한 요금으로 적자를 감당할 수 없었다. 이제는 더 이상 덜컹거리는 기차를 볼 기회는 없다. 다만 우연히 소래포구를 가게 되면 그대의 기억이 슬그머니 노을 진 소래포구에 덩그러니 놓인 철길만 멍하니 바라보게 할 뿐이다.

“엄마 찬바람도 부는데 소래 한번 가실래요?”

“너나 다녀와라, 힘들어 쉴란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같이 가자고 할까 봐 걱정할 일도 시간이 지나니 없어졌다. 이런 것도 대물림이 되는지 잘 놀고 있는 애들한테 바다를 보러 가자고 꼬여 해 질녘 소래포구로 갔다. 젓갈시장 화재로 뿔뿔이 흩어져 어머니의 20년 단골이시던 최 씨 할머니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더군다나 어머니가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시던 육젓의 맛도 나는 모른다. 어울리지 않는 포구의 반 토막 풍경은 새로 지은 아파트가 차지하고 있다. 수평선 너머로 지나가던 해는 아파트 사이로 무심히 넘어가 버린다.  물 빠진 포구 건너편엔 정박한 배들도 낙조를 물끄러미 쳐다보듯 진득한 갯벌에 푹 박혀 있다. 

떼 지어 날아다니는 갈매가 만이 정지된 풍경에 날렵한 화가의 붓질처럼 흐느적거릴 뿐이다. 한편엔 먼지 가득한 협궤엽차의 철길이 물끄러미 수평선만 그려줄 뿐 소래의 하루는 흘러간다. 깜깜해진 소래를 빠져나온다. 어려서 느리고 무섭고 잔뜩 웅크리고 지나가던 기억은 지나가는 고속전철처럼 지나가 버린 것이다. 문득 비릿한 새우젓 향을 맡을 때면 협궤열차의 추억이 떠오른다. 풍경이 사라질수록 머물던 냄새는 더 진동한다. 삶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기억되는 추억은 진하게 머릿속에 머문다. 예전의 자리에 내가 없고 풍경이 사라지니 회한이란 붓으로 습관처럼 덧칠을 시작한다.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화가가 된 듯 포구 한편에 앉아 추억이란 붓으로 사라져 버린 포구의 노을 속으로 달려가는 협궤열차 한 대를 그려 넣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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