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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든기억 깨우기 Jan 21. 2021

딸! 아빠 닮아 미안하다

 어릴 적 내 별명은 동네 어른들 말씀으론 애기부처였단다.

애가 잘 돌아다니지도 않고 마루에 앉혀 놓으면 하루 종일 마루에 있고 방에 갖다 놓으면 방에서만 놀아 붙여진 별명이다. 내가 네 살 때 공무원이시던 아버지가 수원으로 발령을 받아 고향을 떠나 이사를 가게 되었다. 급하게 떠나게 되어 누나와 부모님은 수원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나만 할머니 손에 몇 년 살 게 되었다. 그 당시엔 공무원 월급이 박봉이라 어머니도 따로 부업을 하셨기에 어린 나까지 돌보기 쉽지 않아 할머니 손에 맡겨진 것이다. 할머니는 농사일로 아침에 나가셔서 저녁에야 돌아오시니 당연히 어린 나는 동네 아줌마들과 친척들에게 보살핌을 받게 되었다. 우연히 결혼하고 고향 집 근처에서 출퇴근을 몇 년 하게 되었다. 옆집에 예전 고향 집에 세 살던 분을 만나게 되었다. 나는 몰랐는데 어머니가 아들집에 오시다가 우연히 길에서 만났다고 한다. 어머니와 함께 인사를 가게 되었는데 그 아주머니가 어머니한테 말씀하셨다.

“언니 그때 우리는 제 데리고 도망갈 생각도 했었어요” 

그 집은 결혼하고 한동안 애가 없어 적적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애가 하도 순해서 아줌마가 거의 나를 키우다시피 했는데 정이 많이 들었다고 한다.     

나는

“이 집은 돈도 많고 고향에 오래 살았으니 날 데리고 갔으면 나도 풍족하게 살았겠네”

하고 어머니께 농담도 했었다.

할머니가 봄이 되어 농사로 바쁘면 새벽에 항상 일을 나가셨다. 자고 있는 내 머리맡에 과자 봉지 하나와 밥상을 차려놓으면 애는 아침 그대로 자고 있고 과자와 밥만 없어졌다고 하셨다. 학교 다닐 때도 부모님께 큰 신경 안 쓰이게 학교생활도 했다. 제때 결혼도 하고 졸업 후 바로 취직도 했다. 지금까지 아들딸 낳고 군소리 없이 잘살고 있으니 내 기준엔 무난한 자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면서 내 생각이 틀렸다 는걸 깨달았다. 큰 아이는 태어나면서 누가 봐도 나의 자식인 걸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나랑 똑같이 생겼다.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생각도 비슷하고 식성도 비슷하다. 가장 큰 문제는 내 성격을 똑같이 닮은 거다. 집에 닮을 사람이 지천인데 말이다. 똑 부러지고 일 잘하는 아내를 닮든지 수더분하고 이웃들에게 칭송이 자자한 할머니를 닮던가 아니면 머리 좋은 할아버지를 닮아야 했다. 하필이면 딸은 나를 닮았다. 그래서 딸아이는 순하다. 두 둘된 아이를 데리고 하루 종일 돌아다녀도 한번 안 울고 길거리에서 앉아 오뎅 사주면 아무 소리없이 다 먹는 아이였다. 이런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부터 틀려지기 시작했다. 일단 말수가 적어졌다. 식구들과 얘기하는 횟수도 줄어들더니 어느순간 방문을 닫기 시작했다. 우리 집은 각자의 방은 있지만 잠을 잘 때도 모두 문을 열고 자는 집이다. 잘 때 공기도 잘 통하고 식구끼리 허물없이 지내자가 나의 가족관이기 때문에 그리한 것이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더욱더 갈등은 커지게 되었다.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딸아이는 항상 나에게 말했다.

“아빠는 잘 모른다. 서운하다”

그러면 나도 나대로 변명아닌 변명을 한다. 

“아빠같이 해주는 사람은 이 나라에 한 명도 없을 거다”

“넌 지금은 모른다”

우리는 서로 대립을 하곤 하지만 내 입장에선 답답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내가 너무 고지식하기 때문이다. 본인이 한번 마음먹은 건 꼭 하는 성실성도 있지만 늘 손해만 보는 성격도 나는 맘이 안 든다.

아내에게 가끔 푸념하곤 한다.

“내가 큰 앨 보면서 내 성격의 단점을 알았어”

“나도 저래?”

하고 말이다.

그럼 아내는 나에게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말한다.

“당신도 그래”

기가 막힐 노릇이다. 내 성격이 저렇다니...

하지만 정신 차리고 딸아이를 살펴보면 내가 하는 생각과 마음 씀씀이가 정말 흡사하다. 그래서 내가 딸아이에게 더 잔소리를 많이 하는지도 모른다. 요즘같이 고학력과 연예인 뺨치는 외모를 가져야 좋은 회사에 취직하는 마당에 우리 아이는 이다음에 잘 먹고 살 수 있을까? 아니면 좋은데 시집가서 편히 살아야지 하는 걱정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걱정 하지 말고 아빠나 신경 쓰세요”

라며 딸은 늘 핀잔을 주지만 부모입장에선 달갑지 않은 대답이다.

추석 명절에 어머니에게 한번 물어봤다.

“엄마 나는 자라면서 속 한번 안 썩인 거 같은데 쟤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하자 어머니는 크게 웃으시더니 한 말씀 하신다.

“너도 속 많이 썩였다”  

말도 안 돼, 나 같은 자식이 속을 썩이다니 하고 생각을 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도 내 딸과 똑같은 행동을 했고 아니 더 심하게 했다.

학교를 다니기 싫다고 부모님을 당황하게 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음악을 한다고 했다가 아버지한테 맞은 적도 몇 번 있다. 대학에 진학할 때도 아버지는 공무원이나 국영기업에 취업해서 편히 살길 바라셨지만 혼자 원서도 바꿔 지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한 번도 나에게 혼을 낸 적도 없었고 슬그머니 주머니에 용돈 넣어 준 기억밖에 없다.

“어머니는 왜 그때 혼 안 냈어요?”

하고 물어보면 이런 말씀을 하신다.

“혼낸다고 아니? 그렇다고 내가 널 설득시킬 재주도 없고”

“그냥 기다린 거지 넌 천성이 나쁜 애가 아니니까”

 나도 직장에 가면 나에게 아이문제로 고민상단을 하는 직장 후배들이 종종 있다.

아이 공부는 어떻게 시켜야 하는지, 성격을 밝게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물어본다. 그럴 때면 난 내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술술 답변을 잘해준다. 희한한 것이 거짓말은 아닌데 내 자식에겐 나도 부족함이 한 가득인데 남들 앞에선 잘도 떠들어댄다. 그러면 나 스스로 위안을 삼기도 한다. 서울대 상대 교수가 나라 경제를 살리나? 나라 경제 살리는 인재를 만드는 거지하고 말이다. 나는 딸에게 바라는 건 없다. 너무 착하지 말고 너무 손해 보지 말고, 약삭빠르게 잔머리도 써가면서 고집 피우지 말고 융통성 있게 세상을 살기를 바랄뿐이다. 하지만 늘 딸에게 얘기 하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뻔하다.

“아빠도 못하면서 나한테 맨날 말만 해”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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