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잠든기억 깨우기 Jan 23. 2021

그리고 싶은 그림

오늘도 별다른 변화 없는 슴슴한 하루를 마감하고 무의식적으로 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오늘같이 갑자기 어두워진 저녁이면 버스 정거장에서 바라보는 맞은편 상가의 2층 화실이 유독 환하게 눈에 들어온다. 화실에서 풍기는 물감의 알싸한 냄새와 사각거리는 연필의 움직임이 크게 들리는 듯하다. 올봄 그림을 그리고 싶어 용기 내어 화실에 전화를 걸었다.

“저 나이가 좀 많은데 취미로 그림을 배울 수 있을까요?”

“그럼요 일주일에 두번정도 2시간 정도씩 그리면 됩니다”

들뜬 마음을 먹고 퇴근 후 화실 앞으로 가다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화실 안엔 몇 명의 중 고등학교 아이들과 초등학교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늙수그레한 내가 들어가서 화실의 분위기를 바꿔 놓을 수 도 있겠다는 하는 망설임에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론  화실앞을 지날 때마다 화실을 멍하니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

 나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나보다는 누나가 그림을 더 잘 그리고 좋아했다. 남매가 나가 놀지도 않고 온종일 잡지에 그림을 그리고 있으니 어머니 입장에선 엄청 답답하셨을 거다. 아무 말 없이 마주 보고 앉아 어머니 눈에는 낙서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오죽해야 어머니는 울면서 안가는 나를 태권도학원에 끌고 들어가 

“얘 운동 좀 시켜주세요”

하고 체육관에 억지로 집어넣기도 하셨다. 나중에 공부 안 하고 체육관만 간다고 그나마도 그만두게 하셨다. 누나는 중학교를 들어가자마자 그림에 소질을 보이기 시작했다. 입학과 동시에 미술반에 들어가 온종일 그림을 그리다 왔다. 학교 미술대회와 시도에서 개최되는 대회에서 상도 곧잘 받았다.하지만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미술학원에 다닐 여건도 되질 않았고 공무원이신 아버지의 의도대로 일찍 공무원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중학교에 입학하고 소극적인 성격으로 미술반에 들어가진 못했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커지는 덩치에 체육 선생님이 따라다니며 

“너 역도 한번 하지 않을래?”

하시면서 계속 운동부에 들어오라며 꼬셔대기 시작했다. 

“계속 운동하면 장학금도 받고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따면 네 인생은 꽃길이야” 

이후에 아버지의 불호령 가득한 한마디에 체육 선생님은 나를 더 이상 부르질 않았다. 중학교 2학년 때는 담임선생님은 미술 선생님이셨다. 선생님이 미술 시간에 그린 그림을 보시더니 연필 몇 번 왔다 갔다 하더니 스케치북의 그림이 다른 그림으로 바뀌는 마법을 보였다.

“내가 그림 그리는 걸 가르쳐 줄 테니 가끔 들려 그림을 그리고 가도 된다”

하셨다. 선생님과 일부러 퇴근 시간까지 그림도 그리고 같이 집으로 가면 선생님은 늘 미술 얘기를 해주셨다. 고등학교에 가서는 미술시간에만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싫어하는 친구들은 나에게 스케치북을 주며 한 장만 그려달라고 부탁도 자주 했다. 학교후문 이모분식집에서 끓여주던 라면 한 그릇 먹고 많이 그려 주었다. 3학년 신학기 때에 미술 선생님이 새로 오셨다.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부임하신 젊은 여선생님 이셨다. 하루는 미술 시간에 소묘를 그리는데 자기가 좋아하는 물건을 그리라고 하셨다. 나는 얼마 전에 어머니가 사주신 하얀색 나이키 운동화를 책상에 올려놓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그림을 보시더니 

“너 학원 다니니?”

“아뇨 그냥 그리는 건데요”

“수업 끝나고 나 좀 보자” 

하실 길래 교무실로 선생님을 보러 갔다. 선생님은 나를 데리고 화실로 데리고 갔다. 내 기억에 학교 화실은 꽤 어두웠고 암막 커튼 사이로 비춰지는 오후의 하얀 빛줄기가 어두운 화실바닥에 오선지 마냥 빛나고 있었다. 선생님이 커튼을 젖히자 뿌연 먼지 사이로 햇빛이 쏟아지면서 화실 한편의 석고상들이 밀라노의 벽화들처럼 살아 움직이 듯 나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저 앞에 보이는 석고상 한번 그려봐라”

그리기에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는 석고상이 있어 의자에 앉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중에 아그리파상이라고 석고소묘에 많이 그려지는 석고상이라고 했다. 선생님이 유심히 그림을 보시더니 부모님과 한번 연락을 하고 싶다고 하셨다.

그 후 어머니에게 들은 얘기인데 미술 선생님은 1년만 잘 가르치면 충분히 미술대학을 보낼 수 있다고 아버지를 설득시켰지만, 아버지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그림을 그릴까 봐 선생님에게 착실히 공부 잘하는 아이에게 바람 넣지 말라고 오히려 화를 내셨다고 한다. 그 후론 집에서 그림은 그릴 생각도 하지 못했고 아버지 말씀대로 책만 보는 보통 학생이 되었다. 

 그 후 일반대학에 들어가 동아리며 취미로 그림을 배우려고 몇 번 시도해 봤지만 쉽질 않았다. 취직 후 집에서 독립하게 된 나는 제일 먼저 찾아 간 것도 미술학원이였다. 이제 그림을 나 혼자 그릴수 있겠구나 하고 갔지만 신입직원으로의 고된 일과 직장 선후배들과 놀기 바빠서 몇 번 가지 못하고 그만두기 일쑤였다. 그 후론 결혼하고 아이 키우다 보니 그림의 꿈은 잊게 되었다. 

한번은 큰아이가 어려서 그림 그리는 걸 보고 아내에게 

“얘 그림 그리는걸. 좋아하나 봐 크레파스 만지는 게 틀리네“

했지만 나보고 딸 바보라고 핀잔을 주기 일쑤였다. 당연한 것이 아내는 학교 수업 중에 제일 싫어하는 과목이 미술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아이에게 미술과외를 시켜주었다. 내가 못한 한을 아이에게 푸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나 스스로 아버지같이 되기는 싫어 아이에겐 강요하지는 않았다. 아이도 꾸준히 그림을 그리진 않았지만 고3 때 뜬금없이 학원에 다녀 미술을 전공하고 싶다고 하더니 얼마 다니지 않고 미술대학에 합격 했다. 공예를 전공하는 과였지만 아이도 만족하고 잘 다니고 있는걸 보면 “너는 부모 잘 만나 좋겠다”하고 내심 부럽기도 한다. 

 DNA의 힘은 대단하다. 부모님은 그림을 그려보지도 않았고 좋아하시지도 않는 분들이었다. 하지만 외갓집엔 화가로 지내시는 형님이 두 분이나 계시다. 내가 살아보면서 느낀거지만 나는 친가 쪽의 체형도 안 닮았다. 둥글둥글하고 성격도 모질지 못하고 물 흐르는 편히 살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외가 쪽 성품과 체형을 빼다 박은 것이다. 그래서 예전부터 친가 쪽 보다는 외갓집에 가길 좋아했고 사촌 형들 보다는 외갓집 형들과 노는 것을 더 좋아했다.

만약에 아버지가 고 3때 미술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나에게 그림의 기회를 주셨다면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하다. 과연 미술대학을 들어갔을까? 친구들과 가끔 집안얘기와 옛날얘기를 하면 친구들은 나에게 너 미술대학 갔으면 아마 지금보다 훨씬 못살고 있었을 거다 하고 놀려댄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름 아버지 말대로 얌전히 학교 다니고 오십이 넘은 지금까지 한 직장에서 돈벌이하고 있으니 어머님도 식구들도 나름 다행이라고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오늘도 퇴근길에 스산한 바람과 함께 구름이 몰려오더니 동지 지난 겨울 저녁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어둠이 퇴근길 저녁 화실의 불빛은 오늘 유난히 더 밝게 빛난다.

크리스마스가 내일모레지만 코로나로 인해 올 한해는 별다른 추억도 행사도 없이 쓸쓸한 일 년과 연말이 돼버렸다. 문득 이번 주말은 간만에 아버지 한테 한번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작년에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유독 날씨가 요상하게 바뀌면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난다. 아버지한테 가서 물어보고 싶다.

“아버지 그때 왜 미술을 안 가르쳐 주셨어요?”

“난 그때 아버지한테 말은 못했지만 그림을 정말 그리고 싶었는데”

아마 아버지는 하늘에서 그러시겠지

“그때 그림을 안 했으니까 지금 이나마 먹고사는 거다”

그러실 게 뻔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처럼 서운하지도 않다. 그림은 못 했지만 살아온 여정을 살펴보면 미술을 하나 안 하나 내 성격상 지금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거 같다.

 큰 경기에서 은메달을 딴 사람과 동메달을 딴 사람 중에 누가 더 행복할까? 라는 질문에 답은 동메달을 딴 사람들이 더 행복하다고 한다. 은메달을 딴 사람들은 금메달을 놓쳐 내심 아쉬워하지만 동메달을 딴 사람들은 그나마 메달을 따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미래에 대한 꿈을, 그리고 과거의 꿈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품고 살고 있다. 은메달과 동메달을 다 품고 사는 것이다. 가지지 못한 꿈의 아쉬움보다는 지금 잘살고 있는 것에 대한 즐거움을 알아야 세상을 현명하게 사는 방법이다.

지금도 연필꽂이 한편엔 4B연필이 생뚱맞게 하나 꽂혀있다. 언젠가는 묵은 연필 꺼내 칼로 정성스레 깎아 쓸 날 있겠지 하고 놓아둔 것이다. 나의 50대 자화상 같은 생뚱맞은 4B연필 하나가 나에게는 인생의 은메달이고 동메달이다. 

작가의 이전글 먹는게 뭔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