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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든기억 깨우기 Jan 24. 2021

사랑... 한번 더

“오늘은 아침엔 가끔 흐리고 오후부터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겠습니다.”

이른 아침 출근길 무심히 라디오에서 오늘의 날씨가 소개된다. 언제부터인가 눈이 온다는 말도 밋밋한 하루의 일상이 된 듯 흘려버린다. 늦은 오전 하늘에서 정말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문득 하늘을 쳐다보니 눈발이 얼굴에 부딪치며 미지근한 일상을 자극하듯 기분 좋은 차가움이 어디론가 문득 가보고 싶은 충동이 들게 했다.     

성북동이 그러하다. 바쁜 일상에 메워 늘 앞만 보고 가던 마음을 시골 버스정거장에 버스 기다리며 하늘한 번 쳐다보게 하는 동네이다. 먼 기억 속에 추억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듯 정겨운 풍경이 그려진 동네다. 언덕 저편에서 성북동 비둘기들이 후드득 나타날 것 같고 서울 도성길 아래 잔설 밟으며 말바위 전망대에서 바쁜 서울만 바라봐도 마치 여행자가 된 듯 마음 편안해 지는 곳이 성북동이다. 오늘 문득 성북동이 가고 싶어졌다. 시간을 잠시 붙들어 놓을 수 있는 그 곳을 늦은 오후의 반나절 데이트지만 아내와 성북동으로의 여행을 꼬셔본다.

“오늘 오후에 약속이 있어?”

“아니 없는데”

“ 그럼 나오셔 나랑 어디가자”

“어디?”

“음 멀진 않고 일단 나와 여행 떠나게”

뜬금없는 여행 얘기에 흠칫 놀라 농담인줄 아는 아내에게

“그냥 바람이나 쐬자고”

“어디 갈건데”

“음... 성북동 알아? 멀지 않은데 설렁설렁 다녀도 볼 곳이 많아”     

언제부터인가 아내와 성북동 길상사를 한 번 가보고 싶었다. 특히 눈 내린 겨울 따뜻한 오후 아내와 조용한 길상사에 들려 김영한과 백석의 사연도 들려주고 길상사 한편에 앉아 여유 로이 차 한 잔도 마시고 싶었다.

바로 오늘이 그날이다. 눈 살포시 내리는 따뜻한 겨울...

버스에서 내려 아내와 함께 골목길 따라 길상사로 향한다. 

“서울 한복판인데 유명한 절이 있어?”

“있지. 아주 유명한 절이야”

“길상사라고 들어봤어”

“TV에서 법정스님 때문에 들어본 거 같은데”

“맞아 법정스님이 있던 곳이야. 종교의 숭고한 뜻도 어린 곳 이지만 김영한이란 분과 백석시인의 사랑이야기도 곳곳에 스며있어”

어느새 길상사 일주문 앞에 다다른다. 일주문 현판에 “삼각산 길상사”란 글씨가 뭉뚝하니  오후 햇살을 받아 그 음영이 진하다. 

길상사 관세음보살상이 물끄러미 잔잔한 미소로 맞이해준다.

“희한하다. 전혀 불상같이 생기지 않았네”

“맞아 관세음보살상인데 성모마리아상 분위기가 나지”

“조각가 최종태씨가 만든 작품인데 천주교 신자라고 하더군”

“근데 여기는 분위기는 참 편하고 좋은데 절보다는 그냥 공원 같기도 하고 한옥집 같기도 하네”

“잘 봤네. 여기는 처음엔 대원각이라는 요정 이였어”

“그 주인이 김영한이야”

김영한 그는 열다섯에 결혼해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난 후 권번 기생으로 이름을 날린 후 일본으로 유학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와 영어교사인 백석을 만나 운명적인 사랑을 나누웠던 여인이다. 백석의 아버지는 끝까지 둘의 결혼을 반대하고 백석은 김영한에게 도망을 가자고 했으나 끝내 둘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백석과 헤어진 후 김영한은 서울에 대원각을 열어 큰돈을 벌었다. 김영한은 백석의 생일이면 방안에서 하루 종일 불경을 욀 정도로 백석을 잊지 못했고 백석문학상을 만들어 실력 있는 문학인을 발굴하기도 했다. 1987년 미국에 있는 법정스님을 찾아가 대원각을 받아달라고 했으나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다가 훗날 그 뜻을 받아들여 길상사란 절이 되었다. 그 후 김영한은 세상을 떠났고 첫눈 오늘날 길상사 경내에 뿌려졌다. 한 여인의 숭고한 뜻과 깊은 사랑의 사연이 스며있는 길상사를 아내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얘기를 듣고 보니 오늘같이 눈 오는 날 오길 잘했지?”

“그러게 슬픈 사랑 얘기네”

길상사 한편에 앉아 극락전을 바라보니 흩날리는 눈발이 유독 따뜻하게 느껴진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란 시이다. 어쩌면 백석도 평생 김영한을 그리워했을 런지도 모른다. 떨어져 있어 그 사무치는 마음이 백석의 시속에 고스란히 남아있기도 하다.

눈이 나려 나타샤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나타샤를 사랑해서 눈이 나린다고 백석은 썼다.

되새겨 보면 참 아름다운 말이다. 봄이 와서 네가 예쁜 것이 아니고 네가 예뻐서 봄이 온 것이다. 동행하며 같이 인생을 살기에 내가 행복한 게 아니고 내가 너를 사랑하기에 행복한 동행이 된다는 말이다. 외로운 일상에 같이 할 수 있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 행복이다. 누구나가 그 행복을 누릴 수 있지만 그 동행을 아름답게 바라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외롭고 힘들까? 잠깐의 되돌아보는 여행이지만 나의 동반자를 찾을 수 있는 여행은 누구에게나 한번쯤 권할만하다. 

성북동 비둘기마을에 저녁 해가 뉘엿뉘엿 기운다. 

붉은 기운이 잠시 뜨거운 온기인 양 성북동 낮은 지붕에 물들인가 싶더니  어두운 골목사이사이 나와 나타샤가 지나가는 눈길을 인도하듯 파르르한 가로등 불빛이 켜지기 시작했다.

멀리 떠나고 화려한 풍경이 보인 여행은 아니었지만 김영한의 깊은 사랑의 이야기는 서로가 말을 안 해도 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만으로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왕 여기까지 나왔는데 대학로 가서 연극 한편 보고 갈까?”

“타임머신이 따로 있나. 우리가 옛날 기억 속으로 돌아가면 그 곳이 추억이지. 갈래?”

“그러자” 짧은 말 한마디에 미소가 한 가득이다.

오랜만에 들러보는 대학로의 풍경에 학창시절 친구와 다녔던 길이 새롭고 결혼 전 아내와 연극 보러 오던 그곳의 기억이 날리는 눈발 사이로 뭉글뭉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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