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희뿌연 미세먼지가 앞 동네 아파트까지 가리더니 정오엔 햇빛이 잠깐 비춰준다. 나가려고 준비하니 빗방울이 떨어져 다시 주저앉게 되니 하늘이 또 맑아진다. 날씨 변덕이 백화점 간 아내가 진열대 옷 넘기듯 변화무쌍하다. 봄 날씨가 아무리 요상해도 요즘 아파트 화단엔 봄꽃이 한 가득하다. 슈퍼 가는 길 101동 앞엔 목련 나무가 가득하다. 몇일 날이 좋더니 아파트 단지에 수북이 꽃을 피웠다. 목련이 활짝 피웠을 땐 낮에는 커다란 유정란 처럼 탐스럽다.. 하나 뚝 따서 만지면 양손 한가득 생명이 살아있는 듯 따뜻하고 꿈틀거릴 것 같다. 밤이 되어 아파트 가로등이 켜지면 목련은 루프탑 카페의 앵구등 처럼 환하게 비춰 움츠린 어깨를 펼치게 하는 재주를 피운다. 한가득 피운 지 얼마 안 되었는데 그새 뚝뚝 떨어져 버리고 만다. 꽃잎이 떨어져 땅에 스며 갈색 옷을 갈아 입었는지, 너무 세게 떨어져 꽃송이에 멍이 들었는지 쳐다 볼수록 목련은 안따갑다. 101동 따라 아래로 내려오면 103동 시작되는 텃밭엔 매화나무 한 그루가 흐드러지게 꽃을 피웠다. 크지도 않은 나무가 제법 앙팡지게 꽃을 피웠다. 문방구에서 파는 수수깡에 다닥다닥 팝콘 붙인 것처럼 틈이 안 보인다. 마치 동네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 마냥 옹기종기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게 화려하지만 외로워 보이는 게 딱 서울나무다. 지나가는 아주머니들은 손에서 핸드폰을 꺼내 연신 찍기에 바쁘다. 그냥 지나가는 아저씨들도 한 번씩은 곁눈질 해 줄 정도로 인기다. 점점 아랫동으로 내려가면 산수유도 한창이다. 산수유는 멀리서 바라보면 이모가 젊어서 좋아하던 보푸라기가 멋스럽고 반짝이 액세서리가 달린 노란 뜨개옷 처럼 보인다. 고등학교 때 국어 교과서에 실린 성탄제란 시로 산수유를 처음 알게 되었다. 그때는 산수유 꽃이 노란지 모르고 열매가 빨간 나무로만 알았다. 지금도 습관처럼 누가 열이 난다고 하면 산수유 열매가 열을 내려준다던데 한번 먹어봐 하고 습관처럼 얘기해주고 크리스마스가 생각난다. 아파트에서 제일 먼저 꽃을 피웠으니 색이 노랑에서 점점 옅어졌다. 꽃이 작아 멀리서 보면 그냥 노란 꽃나무지만 자세히 다가가 산수유 꽃을 보면 화려한 왕관 모양을 하고 있다. 넓은 왕관이 아니고 좁고 뾰족한 왕관 모양을 한 것이 품위 있는 임금보다는 여왕이나 공주에 어울리는 왕관 모양이다. 나태주의 “풀꽃”의 시처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내가 요즘 우리 아파트에서 제일 좋아하는 꽃나무는 동백이다. 초라해져 가는 목련꽃 옆도 아니고 화려한 매화나무 옆도 아닌데 103동 아파트 양지바른 한편에 심겨져 있다. 누가 보면 내 집 화단에 심은 것처럼 베란다 끄트머리에 심겨 있다. 잿빛 아파트 담벼락에 짙은 초록색 이파리와 빨갛고 커다란 꽃봉오리가 조화처럼 선명하고 반질거린다. 나무가 굵은 것도 아닌데 이파리며 꽃송이가 프로포즈할 때 받는 장미 꽃다발처럼 풍성하다. 1층에 사는 사람은 아침마다 창문을 열면 동백을 볼 수 있으니 봄이면 얼마나 좋을까? 동백은 사람들 가슴에 세 번 꽃 피운다. 활짝 피웠을 때 한번, 꽃이 지면 땅에서 두 번, 다 지고 나면 사람들 가슴속에 피워 세 번이다. 이제 나는 동백을 한번 피웠으니 아직도 두 번이나 활짝 핀 동백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요란스럽고 변화무쌍한 봄이지만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았다. 앙증맞은 쪽빛 족두리 걸친 제비꽃도 아직이고 흔한 민들레도 아직은 없다. 봄꽃의 절정인 출근길 한강 둑길에 흐드러진 벚꽃도 이제 봉우리만 보인다. 하지만 아파트 화단 아래 자세히 보면 어린 초록색이 하늘거리는 쑥과 잔디는 볼 수 있겠지? 바쁜 걸음에 잠시 땅 기운에 취해 어린잎들을 만지며 하루를 시작하고 싶다.
이런 봄도 변덕스러운 날씨만큼 봄도 슬쩍 왔다 후딱 도망가 버리겠지. 짧으니 더 아쉬운 마음이 든다. 어느 작가는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는 초속 5㎝라고 했다. 내가 사는 서울 한복판의 흘러가는 시간은 초속 몇 백 미터는 되는 거 같다. 월요일 출근인 내일은 그보다 두배는 빨리 지나갈 것이다. 빨리 흘러가니 더 아쉽고 외롭겠지? 너무 빠르면 외로움도 모르고 꽃이 피고 지는 것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다 무심코 한 번 돌아봤을 뿐인데 꽃도 없고 잎도 없는 겨울의 앙상한 나무만 보는 것이다. 얼마나 외롭고 허전할까? 변덕스럽고 이상한 휴일 한나절이지만 나는 오늘만큼은 벚꽃 떨어지는 초속 5cm의 여유와 매력을 배워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