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 없어 못 먹던 음식 중에 맛이 없어진 음식이 몇 개 있다. 김밥이 그러하다. 초등학교 다닐 때 일 년에 딱 두세 번밖에 못 먹는 음식이었다. 봄, 가을소풍, 그리고 운 좋으면 운동회 날이다. 어머니는 소풍 전날이면 시장에 가셔서 시금치, 노란 무, 당근, 달걀, 분홍 소시지, 그리고 김을 준비하셨다. 밤에 창문을 열고 내일 날씨가 맑아야 한다는 기도와 함께 새벽 일찍 일어나면 어머니는 마루에 앉아 김밥을 말고 계셨다. 그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김밥만 먹었다. 아버지와 둘러앉아 먹는 아침도 커다란 접시에 김밥과 국 한 그릇이 전부였다. 점심으로 먹을 김밥은 나무 도시락에 뚜껑이 벌어지도록 담아 고무줄로 칭칭 감아 들고 나갔다. 소풍에서 돌아오면 곧장 부엌으로 달려가 남은 김밥을 먹고 나가서 놀았다. 김밥은 늘 먹어도 질리지 않는 음식이었다. 아버지가 제과점을 하는 친구가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 점심 도시락을 가지고 다닐 때 그 친구는 김밥을 한 줄씩 가지고 다녔다. 시내에서 제일 큰 제과점을 하는 친구는 아침마다 빵과 함께 놓여있던 김밥을 들고 온 것이다. 반찬 냄새가 퍼지는 교실에 친구가 가지고 온 김밥 한 줄의 영향은 엄청났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는 모든 반찬 냄새를 한방에 잠재웠고 도시락을 먹던 친구들의 시선은 까맣고 반질반질한 김밥에 고정되었다. 한번은 소풍날 아침 비가 와서 소풍이 취소되고 학교 교실에서 점심으로 김밥을 먹은 적이 있다. 비온 다음날 소풍을 간다는 말과 함께 어머니에게
“엄마 내일 소풍 간다는데 김밥 또 만들어 주실 건가요?”
“김밥을 또 준비해? 내일은 소시지 부쳐줄 테니 갔다 와”
서운한 마음보다 내일 친구들이 김밥을 다 싸 올 텐데 나만 흰밥이면 창피해서 어떻게 먹나 하는 걱정으로 몰래 혼자 점심을 먹은 기억도 난다. 그 후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김밥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별식이었고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고 물어보면 항상 김밥과 짜장면을 얘기했다.
대학교 졸업 후 취업하고 직장 기숙사에 들어가 저녁을 놓치면 난 숙소 앞에 있는 김밥천국을 자주 갔다. 그곳에서 김밥에 대한 나의 환상은 깨지기 시작했다. 일단 김이 별로였다. 반질반질한 조선 김이 아니었고, 고실고실한 쌀에 참기름 냄새가 진한 짭조름한 밥도 아녔다. 그리고 김밥에 들어가는 재료도 마요네즈, 깻잎, 참치, 돈가스 같은 김밥 본연의 맛을 내주는 재료는 쓰질 않았다. 그 후에도 김밥은 일 년에 두세 번이 아닌 한 달에 여러번 먹는 음식이 되었다. 세미나 발표가 있으면 급하게 김밥을 먹었고 야유회, 체육대회, 점심을 간단히 해결할 때도 김밥을 먹었다. 맛본다는 한 끼 때운다는 요량으로 김밥을 먹은 것이다. 그래서 집에 있을 때는 절대 김밥을 사 먹질 않는다.
맛 없어진 김밥이 TV를 보다 갑자기 생각이 났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에 달걀을 얇게 채를 썰어 터질려고 하는 김밥을 보고 딸에게
“오늘 김밥 한번 해 먹을래?”
“아빠나 만들어 드세요. 난 안 먹어”
“그럼 도와라도 주던가?”
말도 없는 딸에게 서운하지만 혼자 마트에 가서 단무지, 김, 소시지, 시금치, 당근을 사 왔다. 시금치를 소금물에 데쳐 물기를 꼭 짜서 프라이팬에 볶아두었다. 당근은 얇게 채 썰어 볶아두고 소시지도 같이 준비해둔다. 문제는 달걀인데 얇게 여러 장을 만들어 채를 썰어야 하는데 생각보다 쉽질 않다. 보다 못한 딸이
“아빠 내가 부칠 테니 썰기나 하세요”
“진작 도와주지” 하면서
둘이 합세해서 김밥을 만들기 시작했다.
딸 아이가
”나는 김밥에 멸치도 넣고 치즈도 한 장 넣을 테니 아빠건 아빠가 만들어“
하곤 밥에 참기름과 소금을 넣어 밥을 준비해 둘이 마주 앉아 김밥을 만들었다. 딸아이와 김밥을 만드니 한 시간도 안 되어 김밥 여덞줄이 만들어졌다. 엄마와 동생이 오면 같이 먹자고 하고 접시에 썰어 담아두었다. 아내와 아들이 돌아와 김밥을 보더니 냉큼 식탁에 앉는다. 알록달록 썰어진 김밥을 보고 아들에게
”아빠와 누나가 만든 김밥이 있는데 어느 게 맛있는지 맞혀봐라. “
”맞출 게 뭐 있어 아빠가 만든 건 뻔하지“
하면서 연신 집어 먹는다. 그러고 보니 간만에 네 식구가 둘러앉아 저녁을 먹었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점점 같이 밥 먹는 시간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알게 모르게 혼자의 시간이 많아졌다. 아침에도 혼자 먹고 직원식당에서도 감염의 위험으로 한자리 건너 말소리 없이 밥만 먹고 일어난다. 저녁에도 집에 오면 아이들은 없고 늦게 퇴근하는 아내와 둘이 먹는 경우가 많았다. 알게 모르게 혼자인 시간이 많아진 것이다. 혼자일 때가 많아지니 외로움도 모르고 지나칠 때가 많다. 외로움도 익숙해지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끔 오늘처럼 식구들이 다 모여 둘러앉아 있으면 그동안 몰랐던 외로움이 한꺼번에 찾아오기도 한다. 여럿이 섞여 지내면 혼자 있고 싶고 혼자 있으면 섞이고 싶은 게 인지상정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