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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든기억 깨우기 May 08. 2021

퇴촌기행

퇴촌은 조선 시대 조영무가 은퇴하면서 광주의 동쪽 마을인 광동리로 와서 말년을 보내고 그의 퇴촌(退村)이라는 호가 동네 이름이 된 곳이다. 유래만큼 퇴촌은 조용하고 여유로운 동네이다. 퇴촌을 처음 알게 된 것은 30여 년 전이다. 여행 정보가 흔치 않던 때 중앙M&B에서 나온 여행책을 보고 처음 알게 되었다. 글자 일색이던 책만 보다 시원한 풍경과 음식 사진이 그려진 책은 참고서만 보다 재미난 만화책에 빠진것처럼 눈길이 가기에 충분했다. 집에서도 멀지 않고 오는 길엔 퇴촌에서 버스를 타면 강변 터미널까지 갈 수 있으니 서울친구를 꼬여 버스에 올랐다. 생각보다 긴 2시간을 달려갔다. 시내버스인데도 1,000원이 넘는 요금을 내고 친구와 난 언제 도착할지도 모르고 처음 가는 길을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버스 뒷자리에 앉아 갔다. 지금도 그때의 여행이 기억나는 이유는 학교 졸업하고 직장에 취직해 처음으로 친구와 둘이 자유여행을 했기 때문이다. 쪼개진 필름 조각처럼 끊기는 기억이지만 퇴촌까지 가면서 버스에서 친구와 많은 이야기를 하고 팔당호 따라 분원리에 들어가 붕어찜에 막걸리 한 잔 먹고 서울행 막차를 타고 막걸리에 취한 친구와 나의 얼굴처럼 붉은 저녁노을에 빠져버린 팔당호를 바라보며 서울로 왔던 기억이 난다.     

시간은 흘러 퇴촌 가던 친구도 많이 변했다. 흰머리도 제법 나고 갑자기 같이 버스 타고 놀러 가자고 말하는 것도 조심스러운 나이가 돼버렸다. 나도 지금은 어설프게도 아니고 30번 버스 대신 자가용을 가지고 편하게 퇴촌을 간다. 서울에서 퇴촌 가는 길은 어렵지 않다. 팔당대교를 지나 45번 국도를 타고 팔당호의 넓고 시원한 풍경을 친구삼아 달리다 보면 도마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에서 광동교를 지나면 퇴촌면의 시작이다. 팔당댐이 만들어지기 전에 징검다리이던 광동교가 단단하고 높은 철근 교가 되었으니 조영무가 바라본 퇴촌은 강물이 낮고 산세는 수려한 모양새 였으니 내가 보는 퇴촌보다 훨씬 더 멋스러운 풍경이었을 것이다. 광동교를 지나면 좌측엔 광동 습지 공원이 파란 하늘이 반영된 밋밋한 팔당호를 알록달록 봄꽃의 노랑과 초록 물감으로 물속을 봄을 풀어헤치기 시작한다. 오른쪽엔 경안천 습지 생태공원이 널찍하게 경안천 한편을 차지하고 있다. 한때 팔당호 오염의 온상이던 이곳이 환경 생태계 복원사업으로 천연기념물인 고니의 월동지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으니 시절이 무상하다. 깨끗한 물먹고 자란 토마토는 퇴촌의 자존심이 될 만큼 품질이 좋아 갈 때마다 들르는 단골집에서 덤까지 듬뿍 담아주니 여유로운 풍경만큼 인심도 넉넉한 퇴촌이다.     

퇴촌을 지나 분원리를 가면 처음 왔을 때 강바람에 새순이 돋아나 바람 따라 휘날리는 버드나무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지금도 분원리를 가면 제일 먼저 버드나무 아래로 가 강물을 바라보는 습관이 있다. 시간은 흘렀지만 흘러가는 강물의 깊이만큼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보기엔 많이 자란 것 같지도 않고 주변에 전봇대 몇 개와 표식만 생겼을 뿐 30년 전 잡지에 보던 그대로다. 퇴촌을 가끔 찾는 뚜렷한 이유는 없다. 잘빠진 도로를 가다 싱크홀에 빠진 듯, 하늘만 보고 달려가다 미로에 갇혀 갈 길을 잃어버린 듯 막막하고 허무할 때 가고 싶은 곳이다. 익숙해지고 편해졌다. 이제는 습지 공원이 생기고 축제가 열려 봄이면 사람들에게 새콤한 퇴촌 토마토의 매력만큼 많이 알려진 곳이지만 지금도 퇴촌은 조용하다. 실타래 꼬아 올리듯 물안개가 자욱해지는 가을, 능수 벚꽃이 활짝 피는 봄이면 문득 그곳으로 향하고 싶다. 아련한 물안개만큼 현실을 피하고 싶어서 그럴 수 있다. 활짝 핀 봄꽃처럼 편하고 웃음 짓게 하는 친구와 여행했던 기억이 아직도 추억의 발목을 잡아서 그럴 수 있다. 진실이 나올 때까지 파헤치고 숫자가 맞아떨어지듯 틈이 없어야 하는 숨 막히는 일상에 지쳐 여유로운 퇴촌의 풍경이 더욱 생각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나가도 좋고 일부러 가도 좋은 나만의 편한 동네인 이곳이 시간이 변하지 않는 강변의 느티나무와 퇴촌의 지명처럼 느긋하고 평화로운 장소로 계속 남아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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