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만들어진 가전제품의 수명은 얼마나 될까? 정답은 쓰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가전제품을 집에서 잘 사용하다 갑자기 고장 나면 제일 먼저 하는 고민이 LG로 살 것인지 삼성으로 살 것인지다. 백색가전이라고 표현되는 냉장고, 세탁기는 집안에서 제일 기본적인 가전제품이다. 요즘은 공기청정기나 스타일러와 와인 냉장고까지 집안에 두고 있는 집들도 많지만 어려서 학교에서 냉장고 있는 사람, 컬러TV 있는 사람 손들어 하면 몇 명만 손들고 아이들은 우와! 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집에 있는 냉장고는 LG 냉장고이다. 결혼할 때 삼성은 LG보다 디자인은 더 세련되었으나 가격이 LG보다 비싸고, LG는 가격도 싸고 무엇보다 내구성이 좋아 웬만하면 고장이 안 난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결혼하기 전 아내와 신혼살림을 장만할 때 우리 역시 LG냐 삼성이냐를 두고 고민을 많이 했다. 카페에 앉아 몇 시간이고 작은 수첩에 다 그려지는 작은 신혼집 평면도를 보면서 냉장고는 어디에 세탁기는 어느 모델로 할건지 어디에 둘 것인지로 오랜 시간 얘기를 나눴다. 결국은 장인어른이 잘 아시는 분이 LG 대리점을 한다는 이유 하나로 모든 고민은 끝이 났다. 결혼하고 모든 전자제품은 LG로 사들였다.
결혼한 지 20여 년이 넘었지만 결혼할 때 사 온 가전제품은 이미 한두 번씩 물갈이가 되었다. 작은아이가 운동해 빨래가 유독 많았던 덕에 세탁기는 제일 많이 바꿨다. 강력한 거로 빨아야 한다고 중간에 와류식 세탁기에서 드럼세탁기로 바꿨고 결국엔 자주 고장 난다는 이유로 하이마트에서 제일 싼 대우 세탁기를 사용하고 있다. TV도 불룩한 29인치에서 한 번 바꿨고 청소기도 두어 번 바꿨다. 하지만 결혼해서 지금까지 한 번도 안 바뀐 전자제품이 있다. 바로 냉장고다. LG 냉장고가 튼튼하다고는 하지만 2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엄청난 냉장력과 냉동력 과시한다. 싱싱칸에 있는 채소들도 며칠 집을 비우면 얼어 있을 정도로 우리 집 냉장고는 튼튼하다. 아이들이 한창 클 때 하루에도 수십 번씩 냉장고 문이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했지만, 음식이 쉬거나 고장 한 번 난 적이 없다. 몇 해 전 새벽에 마루에서 우당탕 소리가 나 깜짝 놀라 나가봤더니 냉장고에서 큰소리가 나며 멈추질 않았다. 새벽이라 사람들이 깰까 봐 냉장고를 끄고 김치냉장고에 일단 상하기 쉬운 것만 옮겨놓고 다음 날 AS 신청을 했다. AS하시는 분이
”아직도 이 냉장고를 가지고 계시는 분이 계시네“
하긴 내가 돌아 다녀봐도 이 냉장고는 아직도 생생하게 돌아가는 집이 많아”
하시더니
“운 좋은 줄 아세요. 이 냉장고는 너무 오래돼서 부속도 없는데 얼마 전에 혹시 몰라
하나 가지고 있는데 달아줄 게 써봐요”
그러고 몇 해가 지났다. 아내와 나는 이번에 고장 나면 미련 없이 냉장고를 바꾸자고 약속했지만 부속하나 갈곤 지금까지 아주 건재하다. 아이들도 태어나면서부터 보던 냉장고가 익숙한지 오래된 냉장고에 대한 불만은 없다. 아내도 마트에 가면 냉장고를 가끔 만지작거리기는 하지만 다행히 가전제품에 욕심이 없는 건지 너무 오래되어 정이 들어서인지 냉장고에 불만은 딱히 없는 듯하다. 단순한 하얀색 냉장고이고 용량도 500ℓ밖에 안 되지만 우리 집에서는 제일 오래되고 가성비가 높은 제품이다.
나도 결혼하고 지금까지 열심히 일했으니 우리 집 냉장고와 비슷한 연식과 신세다. 하지만 냉장고는 일 년 열두 달 큰 고장 없이 식구들의 음식과 건강을 책임져 좋으니 나보다 듬직하다. 오늘은 고단한 하루다. 아침부터 바삐 움직여서 일 처리를 끝내고 집에 들어오니 몸이 축 늘어지는 것이 갈아입은 인견 잠옷이 걸리버여행에 나오는 난쟁이 왕국의 포복 끈처럼 움직이기 싫어졌다. 간신히 일어나 냉장고에 있는 시원한 토마토를 하나 꺼냈다. 오늘은 듬직한 냉장고만도 못하다고 생각을 하니 자괴감도 들고 나와 처지가 비슷한 냉장고가 왠지 같은 팔자를 지닌 친구와 같이 느껴진다. 언제 고장 나는지 모르는 냉장고처럼 나도 언젠가는 고장이 나겠지 하니 씁쓸한 생각도 들지만, 미동도 없이 소음도 없이 일 년 내내 듬직이 서 있는 냉장고를 보며 나도 기운을 내야겠다고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