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목항, 추억의 커피 한 잔
강릉항. 하지만 내 기억 속 그곳은 언제나 안목항이다.
벌써 서른 해도 훨씬 전의 이야기다.
처음 혼자 훌쩍 떠나 도착한 곳이 바로 안목항이었다.
강릉터미널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도착한, 한적한 어촌 마을.
담벼락에 걸린 생선이 바람에 흔들리며 내던 작은 소리까지도 선명하던 어촌마을.
그 후로도 몇 번이고, 내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나는 이곳을 찾았다.
여행이란 게 뭔지도 모르던 시절, 또 한 번은 힘들어하던 친구와 아무 말 없이 겨울바다를 찾았던 그날도.
모래사장에 앉아 자판기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담배 한 대를 입에 문 채
서로의 말 없는 위로를 맥심커피로 대신했던 그 날들.
지금의 안목항은 너무도 달라졌다.
세련된 카페들이 줄지어 늘어서고, 남녀노소 누구나 찾는 커피 명소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다행인 건, 여전히 바다 소리는 그대로이고, 커피 향도 여전히 낯설지 않다는 것.
안목항이면 커피에 대한 추억은 누구나 하나씩 있다. 예전 안목항 자판기의 커피가 맛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그 자판기를 찾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비슷한 자판기들이 도로변에 줄지어 들어섰고,
내가 찾던 그 하나를 더는 구분할 수 없게 됐다.
안목항은 바다도 좋지만 소나무숲 또한 절경이다 송정해변 소나무 숲 한편에 자리했던 참소리박물관도 기억에 남는다. 빌라 몇 동이 전부였던 그 작은 공간엔 축음기와 전구, 스피커가 층층이 쌓여 있었고,그 꼭대기층에서 들려오던 우렁찬 음악은 내 감성을 한껏 뒤흔들었다. 그 고운 선율과 출렁이던 바다의 풍경, 그리고 구수한 자판기 커피 향이 어우러져안목항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특별한 장소로 남았다.
그리고 다시, 십 년도 훌쩍 지난 지금 나는 또 이곳을 찾았다.
많은 사람들은 경포호의 벚꽃 아래서 봄날의 낭만을 즐기고 있지만,
나는 조용히 안목항 바닷가에 앉아 과거의 추억을 꺼내 본다.
손에는 여전히 커피 한 잔이 들려 있고, 눈앞에는 철썩이는 파도가 펼쳐져 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 바다를 오래도록 바라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이토록 바다를 오래 바라보는 건, 치열하게 살아온 일상 때문일까.
혹은 자꾸만 흘러가는 봄날 같은 인생 속에서 잠시나마 멈춰 서고 싶어서일까.
그저 확실한 건,
이곳 안목항에서 나는 다시, 이십 년 전 그 청년처럼
커피 한 잔과 함께, 잠시 멍하니 삶을 바라볼 용기를 얻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