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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 Apr 08. 2021

호의와 권리

- 작가가 심호흡을 하고 결심하여 챙겨야 하는 것, 법적 권리

얼마 전, 개인적으로 마음 아픈 결정을 내렸습니다.

작가로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어쩔 수 없이 부딪쳐야 하는 일이었지요.

모든 일들을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렵겠지만,

혹시 누군가에게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기록을 남기려고 합니다.


모든 일은 계약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나이가 어리거나 초짜 작가의 경우에는 그런 공식적인 이야기가 껄끄럽게 느껴집니다.

정식 등단을 하기 전에는 지인을 통해 일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나이가 어려 계약서를 챙기려니 마음이 불편합니다. 

지인(주로 선배)들이 일을 제안할 때는 실무가 바쁘게 돌아가는 경우가 많아 계약서는 우선 순위에서 빠지기 십상이죠. 이때 당차게 계약서를 쓰고 일하겠다고 말할 수 있는 후배는 많지 않습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자기 것 잘 챙긴다 소문난 세대라도, 한 사람으로 동떨어져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때, '되바라져 보이'지 않을까 눈치 볼 수밖에 없지요.

 "나 못 믿어?"

 "바쁜 거 끝내고 천천히 하자."

선배나 출판사에서 이런 말을 듣는다면 더더욱 계약서 이야기를 꺼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계약서 쓰는 일 자체가 어렵다보니 그 조항에 토 다는 것은 상상하지 못하곤 하죠.

그래서 저는 사회 초년생에 매절 계약으로 시리즈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 시리즈가 거의 20년을 굉장한 기세로 팔렸다는 것을 생각하면, 백오십만원도 안 되는 돈에 7권의 동화를 써준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죠. 

백희나 작가의 <구름빵>을 이런 매절 계약의 폐해로써 대표적 사례로 드는데,

사실 저는 매절계약도 계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누군가의 고의였든 악의였든 내 자신이 싸인한 이상 법적 효력이 있다고 생각해요. 솔직히 20년간 팔린 그 책이 가져온 금전적 이익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것도 그 때문입니다. 지난 일이고, 어리기는 했지만, 분명한 성인이었고 분명히 제 손으로 싸인한 것이니까요. 

Catkin, pixabay.com

법 앞에 서 있을 때, 성인은 모두 평등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이가 어떻든, 상대가 누구든, 내가 어떤 행위를 할 권리가 있고 그 행위의 책임이 온전히 내게 있음을 인지해야 합니다.

되바라진 사람도, 호의를 베풀어야 할 사람도 없는 거죠.

"나 못 믿어?"라고 했던 좋은 선배도 법적인 문제에서는 완전한 타인입니다. 법 행위를 하지 않는 것 이상의 믿음을 기대할 수 없고, 있다 해도 '당연한 권리'가 호의를 기대해야 하는 굴종적 관계로 바뀝니다. 

"바쁜 거 끝내고 천천히 하자"라고 했던 회사에서는 자신이 원한 걸 다 가진 이상 더 좋은 위치에서 개인에게 계약을 강요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바쁜 것이 그쪽의 불리한 상황일 때, 조금이라도 유리한 개인일 때 계약을 해야 하는 것이죠.


굉장히 냉정한 이러한 인식은 저도 많은 경험을 한 뒤에야 갖게 되었습니다.

법은 법 행위를 할 때, 개인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꽤 많은 원고료를 떼어먹혔습니다. 쓰자고 입도 벙긋하지 못한 계약서도 그만큼 많죠.

나중에는 법에서는 성인이라고 말하는데, 스스로 백치나 다름없이 행동하는 제가 한심했습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탓하고 나서야 권리에 대해 당당해질 수 있었죠. 


계약서를 쓴 뒤에도 많은 일들이 벌어진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 조정래 선생님의 <태백산맥> 등에 대한 법적 다툼부터 현재 막 형성되고 있는 웹툰 웹소설 작가들의 부당한 대우 등등 말이죠.

그런 기막힌 일들에 비해 제가 겪은 일은 소소할 수 있지만, 역시 작가들이 맞닥뜨릴 수 있는 법적 상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책이 나오면 분기 혹은 해마다 인세보고라는 것을 받습니다.

이 책이 얼만큼 팔리고 따라서 얼마의 인세가 발생했는지, 언제 입금해줄 지를 보고하는 것이죠.

그런데 책이 팔리지 않으면 인세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계약을 할 때, 계약금은 선인세라고 하여 앞으로 나올 인세의 일부를 미리 지급한다는 의미인데,

금액에 따라 다르지만 1쇄를 다 팔아야 계약금이 해소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이 때문에 인세보고라는 것이 제각각이 됩니다.

어떤 책은 1쇄를 다 팔리지 않으니 몇 년이 되어도 인세 보고를 받지 못하기도 하는 거죠.

출판사가 인세보고를 하지 않으면 작가는 몇 년이 되어도 자신의 책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가 없는 겁니다.

서로 민망한 상황이 되는 거죠.

작가들이란 알고 보면 소심하고 자존심이 쉽게 상하는 사람들이라,

팔리지 않는 이유가 자신의 탓인양 기가 죽기도 하고요. 

제 경우가 그랬습니다.

인세가 얼마나 되었는지 궁금한 것보다 내 책이 어떻게 관리되고 있는지 궁금한데 차마 물을 수 없는 상황.

그 상황이 거의 10년이 지나갔죠.

그러다보니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고 너무 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서점에서 책을 사보았습니다. 그랬더니 2쇄, 3쇄가 찍혀있었습니다.

무슨 사정이 있으리란 생각에 인세보고를 요청했더니, 정중한 어투로 아직 인세가 나올 만큼 팔리지 않아 보고를 할 수 없다는 답이 왔습니다. 

아마도 책을 함께 진행했던 담당자가 퇴사하지 않았다면 일이 더 부드럽게 풀렸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10년 간 똑같은 상황에 소심해진 저는 그렇게 팔리지 않는 책이라면 그만 절판을 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 절판 요청을 했죠.

절판을 하게 되면 단 1부가 팔렸더라도 관련 보고를 받을 수 있을 테니 말이죠.


어이없는 상황은 그 다음에 벌어졌습니다.

절판 요청을 하자 인세 보고를 보내왔는데, 2/3쇄는 한꺼번에 찍은 것인데 그게 잘 팔리지 않아 버리느니 기증을 했다는 것입니다. 무려 천 부 이상을 말이죠.

2/3쇄를 한꺼번에 찍는 것이 합법은 아니지만 관행이라는 것은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래놓고 추가 인쇄 관련 소식이나 인세보고를 한번도 안 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죠.

게다가 절판을 요청하자마자 들려오는 기증 소식이란 어이가 없을 뿐이었죠.

다행히 계약서에는 저자의 허락 없이 그렇게 많은 부수를 기증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출판사 사장님은 이 부분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기에 하는 수 없이 위원회의 중재를 받아야 했죠.

그 자리에서 놀랐던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우선 출판을 평생 업으로 삼은 사장님이 책을 단순히 자신의 재산이라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저자의 저작권과 관련된 잠재적 자산이라는 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계셨죠.

또 하나는 2쇄든 3쇄든 몇 쇄를 인쇄했는지,

작가 입장에서 명확히 알 수 있는 근거가 하나도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작가가 요구할 수 있는 것은 물류창고의 재고 부수 확인증과 인쇄소의 인쇄 발주증서 들뿐인데,

두 곳 모두 출판사와 거의 평생 함께 하는 협력사들입니다.

만일 위조를 한다면 작가가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하나도 없는 것이죠.


책 뒤에는 저자와 출판사 간의 신뢰에 의해 인지를 생략한다고 되어 있죠.

지금도 중고 책방에 가면 뒤에 도장 같은 종이가 붙어있는 책을 볼 수 있습니다.

전에는 그 인지를 작가들이 일일이 붙였고,

그것이 붙인 만큼만 정식 책으로 인정을 해서 유통을 했다는 말입니다.

당연히 귀찮고 불편한 일이었고, 이에 인지를 생략하기 시작한 것이죠.

하지만 신뢰가 깨질 경우, 작가는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하나는 전자책에 관한 것입니다.

저자는 계약할 때, 출판사에 2차 저작물에 대한 권리를 양도합니다. 

전자책은 그 중 하나로 이해되죠.

그런데 전자책이 얼마나 읽혔는지, 작가로서 확인하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대형 서점은 그나마 데이터가 남아있겠지만,

중소 서점들은 물리적 회사의 존재 자체가 의심스러운 경우도 많을 정도니까요.

출판사들이 이 전자책 판매를 인쇄본처럼 꼼꼼히 챙기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또 대형 출판사들의 전자책들이 각 권이 아니라 전체로써 도서관 등과 계약되는 경우도 있는데요,

그 경우 수익이 어떻게 나뉘는지, 그 도서관에서 나의 전자책이 얼마나 열람되는지 알 수 있는 방도란 전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느낀 점은

법적인 행위 앞에서 호의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점입니다.

절판을 요청한 여러 책 중 어떤 출판사는 워낙 영세한 곳이라 단 한 푼도 받지 못한 인세를 굳이 받고 싶은 마음도 없었습니다. 어떤 것은 계약서조차 작성하지 않았으니까요. 단지 깔끔한 마무리만 요청하고자 연락을 햇지만, 결국 중재신청을 하기 전까지 연락이 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제 진심을 알 수 없었으니 피할 수도 있었겠지만, 결국 제 잘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권리를 양보한다고 호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깨달은 계기가 되었죠.

법이 말하는 권리를 다 챙기고 그 후에 금전이든 무엇이든 되돌려주면 호의가 될 수 있지만,

법적인 권리조차 스스로 챙기지 못한 상태에서는 호의를 갖고 있더라도 남는 것은 지저분한 업무들 뿐이라는 것을 말이죠.


중재위원회에서 돈 대신 마무리를 요청한 그 출판사에서 여전히 마무리를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역시 그에 대한 답변도 없고 말이죠.

수없이 겪고도 법적 권리를 지키는 일은 어렵기만 합니다.

그래도 초짜 작가분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꼼꼼히 따지시기를,

표준 계약서 하나하나가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지 이해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적어보았습니다.


아참, 표준계약서는 대한출판문화협회 홈페이지에 가시면 사례 별로 정리가 되어 있습니다.

출판사가 제안한 계약서를 표준계약서와 비교하시면서

궁금한 점은 다 물어보고 계약을 체결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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