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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 Aug 11. 2021

[c.c.c]어지러운 날 밤에는...

견디기 힘들었던 더위가 한풀 꺾인 듯합니다.

사는 곳이 여행지면 피서객들이 종종 찾아오지요.

내 집을 게스트하우스처럼 내어주면 오가는 사람들 향기에 집이 변하기도 합니다. 


잘랄루딘 루미라는 이슬람 시인은 사람을 '여인숙'에 비유했습니다.

이 여인숙의 손님이란 바로 생각이지요.

끊이지 않는 생각들은 저마다 희노애락의 향기를 풍깁니다.

루미는 이 모든 손님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라 노래합니다.

희노애락 가리지 않고 반갑고 감사하게 말이죠.


때로 너무 강한 손님이 여인숙 자체를 뿌리까지 흔들더라도

감사한 마음을 버리지 말라 합니다.

회오리 같은 슬픔이나 분노가 작은 행복의 흔적까지 휩쓸어 간다면

그 다음에 올 행복과 기쁨은 더 크게 자리할 수 있다고요.


이해하기 어려운 시는 아닙니다.

단지 실천하기 어려울 뿐이죠.

행복이나 기쁨이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때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존재를 흔들리게 하는 건 언제나 슬픔과 분노죠.

그래서 슬픔과 분노에 초연할 날이 올까 생각하곤 합니다. 

가만히 그것을 들여다보라는 지혜를 수십 번이나 들었지만 마음에 이는 파도를 잠재우긴 힘들죠.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태풍 속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광풍에 함께 날뛰든, 기둥을 붙들고 두려움에 떨든 선택은 자유지만, 

인간은 그것이 에너지를 다하고 물러날 때까지 그저 있을 뿐이죠.

자기 힘으로 그것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현자들은 공통적으로 침묵하고 지키라고 말했나 봅니다.



Wild Swan


<백조왕자>라고 번역된 안데르센의 동화에는 마법에 걸린 오빠들을 위해 엉겅퀴로 조끼를 만드는 엘리자베스 공주가 나옵니다.

마녀 왕비에게 쫓겨난 공주는 오빠들을 구하려면 조끼를 다 만들어낼 때까지 침묵해야 합니다. 

엉겅퀴는 무덤가에 많이 나는 풀이라죠.

마녀로 오해받기에 좋은 행동을 하면서도 변명할 수 있는 말을 빼앗긴 공주는

결국 화형식날까지 침묵 속에 자기가 할 일을 합니다.


백조로 변한 오빠들을 구하겠다는 마음이 굳세고 진실해서

죽음마저 두렵지 않은 신앙이 된 셈이죠.

이처럼 악에 맞서는 이야기나 성인들의 일화에서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행위는 언제나 죽음과 맞닿아 있습니다.

여기에서 죽음이란 화형식처럼 실제 세계의 형벌일 때도 있지만,

마음 속에 이는 번뇌, 존재를 불타게 하는 불꽃이기도 하죠.


잘랄루딘 루미는 <낙타를 초대한 닭>이라는 우화에서 이 깨달음을 얻는 일의 엄청남을 말해줍니다.

닭은 낙타를 선망하여 온전한 환대 속에 집으로 초대하지만,

낙타에게 닭장은 너무 작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에 응한다면, 닭장은 부서지고 말겠지요.

존재가 부서지지 않고서는 진리와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우화인 것입니다.

하지만  루미는 우리를 여인숙이라고 했습니다.

여인숙은 집이 아니죠.

주인을 뺀 나머지는 모두 언젠가 그곳을 떠나야 합니다.

주인이 친절하고 감사하게 손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언젠가 떠날 것을 알고, 떠날 때 무엇이든 지불할 것을 알기 때문이죠.

그러니 희노애락의 무서운 에너지 속에서 자신을 여인숙으로 만드는 방법은 괜찮은 노하우입니다.


가만히 지켜보면서 시간을 여행하고 나면

우리는 어느 새 다른 손님을 맞이하고 있겠지요.


지치는 손님 때문에 나가떨어진 저녁,

가만히 책을 펼치곤 합니다.

루미도 그렇게 읽게 된 책인데...

종교와 상관없이 경전을, 그리고 깊은 시를 읽곤 합니다.

한 글자씩 새겨 읽다보면 잠시 잊어버린 지켜보는 법을 다시 배우게 되니까요.





매 숨결마다 생각이 찾아온다
매일 귀한 손님처럼 그대 가슴에

- <여인숙>, 잘랄루딘 루미, 번역: 누리 https://blog.naver.com/tempter12/22105237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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