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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 Jun 19. 2023

이곳에 살기 위하여

지금, 그때, 같은 나에게


제목을 써놓고 보니, 폴 엘뤼아르의 시 제목이었어. 너의 무의식 속에 있었던 거니?







창가의 벽이 피를 흘리고
나의 방에서 어둠은 떠나지 않는다.
나의 눈이 폐허에 부딪치지 않는다면
나의 눈은 어둠 속을 들여다 볼 수 있으리라.
유일한 자유의 공간은 내 마음 속 깊은 곳
그것은 죽음과 친숙한 공간
혹은 도피의 공간







 무너짐을 따로 쓰지 않아도, 폴 엘뤼아르를 베껴 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네.
그런데 늘 폐허에 부딪치는 너의 눈은 어찌해야 할까?
사실, 넌 알고 있지. 이미 어둠은 익숙한데, 네가 자꾸 눈을 감고 있다는 걸.. 감고 있으니 부딪칠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아... 네가 잘 알고 살아가는 이 세상이 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걸.
물론 알아. 너는 무채색 보다 화려한 무지갯빛을 좋아한다는 걸.
무지개를 향해 뻗던 손이 잘리지 않았다면, 네 세상은 전혀 다른 곳으로 나아갔겠지.
...하지만 받아들이기로 했잖아. 그렇게 흘러간 시간을....
...응...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매 순간 평온한 건 아니지. 감지덕지한 것도 아니겠지.






나는 불꽃이 파닥거리며 튀는 소리만으로
그 불꽃이 타오르는 열기의 냄새만으로 살았다.
나는 흐르지 않는 물 속에 침몰하는 선박
죽은 자처럼 나에게는 단 하나의 원소밖에 남지 않았다.











그렇지만 말야, 꿈꿨잖아...
너를 사랑하는 게 그렇게 힘들다면, 어둠 속에 웅크린 불쌍한 그 사람들 만큼이라도 사랑해보기로..
비록 무채색에 웃음도 없고 아름답지도 환하지도 않은 사람들이지만.. 엘뤼아르 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들을 배신하지 않기로 했잖아. 그게 네가 받아들인 마음이었잖아...






하늘이 나를 버렸을 때, 나는 불을 만들었다.
동지가 되기 위한 불
겨울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불,
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한 불을.







혁명을 노래한 엘뤼아르 앞에 부끄럽지만, 너는 네가 선 곳의 삶을 지지해야 하잖아.
원래부터 어두웠던 이곳을, 이 한결같은 어둠을....
약속한 대로의 시간 동안 살아가자... 어둠을 배신하지 말고, 어둠 아닌 다른 곳에 눈 멀지 말고, 하지만 되도록 웃으면서, 아침에 무너져도 다시 힘내자. 약속한 그 날 그 시간까지, 이곳에 살기 위하여....


난 전생이나 사후를 전제하는 이야기가 싫어.

하지만 너무 재미있어서 다 보곤 해.

과학을 신봉해서가 아니야.

삶을 자꾸만 선택지로 착각하게 해서지.

도대체 어떻게 하면 영혼이 이렇게 헐거워질까?

난 알아.

몸과 혼백 사이에 틈을 내는 건 폭력 뿐인 걸...

어떤 형태이든...

미워할 대상이 없어진 상처는 아물 수가 없어서 가끔 온 힘을 다해 붙들고 있어야 하지.

극단적 선택이란 말은 틀려먹었어.

사람은 종교적이든 아니든 삶과 죽음은 운명의 영역에 맡겨야 해. 선택지에 올리는 순간, 숭숭 바람든 삶은 지옥에서 부는 바람에 영혼의 마디마다 시리고, 고비고비 육신을 쑤셔댈 거야. 마침내 벼랑 끝까지.

그러니 제발, 그만 생각하자.

이곳에 살기 위하여.........





어떠한 인간도 사라지지 않으며
어떠한 인간도 잊혀지지 않으며
어떠한 어둠도 투명하지 않다.

나홀로 있는 곳에서 나는 많은 인간을 만나며
나의 근심은 가벼운 웃음으로 깨어지고
엄숙한 나의 목소리에 뒤섞여 들려오는 부드러운 목소리
내 눈은 순수한 시선의 그물을 유지한다.

우리는 험난한 산과 바다를 지난다.
미친 듯한 나무들이 맹세한 내 손의 길을 가로막고
방황하는 동물들은 생명을 산산조각 내어 나에게 몸을 바친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의 영상이 풍성해지는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자연과 거울이 흐려진다는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늘이 비어 있다는 것이,
나는 외롭지가 않은데.










- 모든 인용은, 폴 엘뤼아르 Paul Eluard(1895-1952)의 <이곳에 살기 위하여 Paur vivire ici>에서 가져왔습니다. 행과 시어는 그대로지만, 연은 순서대로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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