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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 Dec 25. 2019

서른, 마흔, 세월을 앓는 겨울에게

- 어느 날, 내 것일 것 같지 않는 나이가 배달되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입니다.

12월이 되자마자 들뜨라고 부추기는 화려한 거리를 걷지만, 마음 한구석이 차분하다 못해 우울한 분들도 꽤 많죠. 평소에 쾌활하던 사람들 중에도 갑작스레 싸해지는 기분을 느끼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특히, 새로운 달력을 받아들고는 서른 혹은 마흔, 특별한 나이 대로 들어선다는 것을 깨달은 분들 중에서요.


상식, 혹은 고정관념이 생각보다 무서워서 새 달력이 배달해준 새로운 나이가 사람의 기분을 변화시킵니다. 때로는 아주 무겁게 말이죠. 10대는 청소년, 20대는 젊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믿고 있던 사람들도, 막상 30대를 앞두고 있으면 가슴 한 켠이 무겁기만 합니다. 취업, 결혼, 연인, 병역, 내 집, 내 차....... 피상적으로 우리는 30대가 시작되기 전에  이것들을 성취해놔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죠. 29살 12월 31일까지, 이 모든 것을 해결해 놓아야 제대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런 것을 성취할 수 있는 20대가 몇이나 될까 궁금합니다. 이 중 하나라도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개인적으로 저는.. 하나도 갖지 못해했습니다. 그래서 많이 힘들었지요. 서른은 더 이상 젊음이 아니라는 생각에, 20대처럼 시도하는 것이 자연스러워보이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더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작가가 꿈이었는데, 저는 작가들은 20대에 다 등단을 하고, 30대에는 걸작을 써야한다고 믿었거든요. 저는 실패자라는 생각을 늘 하고는 있었지만, 서른이라는 나이가 주는 좌절은 더 이상 시도할 기회도 사라졌다는 더 큰 절망이었습니다.

<은하철도 999>의 대사도 저를 위로해주지는 못했죠.

지금은 이렇게 과거형으로 말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 괴로움이 별 것 아니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나이듦의 낯섦은 여전하니까 말이죠.


   "나는 무엇인가. 내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내가 주의를 기울이는 것 모두가 나 자신이다.
어둠으로 내려앉는 것,
빛 속으로 다시 떠오르는 것 모두 나 자신이다.
배반과 충성심, 실패와 성공 모두 나 자신이다.
나는 나의 무지이고 통찰이며, 의심이고 확신이다.
또한 두려움이자 희망이다."
온전함이란 완전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부서짐을 삶의 총체적인 부분으로서 끌어안는다는 뜻이다. 

   - <모든 것의 가장자라에서>, 파커 J. 파머 저, 김찬호, 정하린 역, 글항아리, 37쪽

그래도 조금 달라진 것이 있기는 합니다. 

괴롭기는 해도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온 인생이라면 어찌되었든 낯선 나이의 통증을 견뎌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입니다. 저는 이제 허물을 벗고 있는 뱀은 아픔을 느끼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분명히 그럴 거예요. 충분히 무르익은 후에 허물이 벗겨지는 것일 테니까요. 억지로 벗지 않으려 하거나 벗겨내려 한다면 허물일지라도 아프겠죠.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삶을 살아간 사람이라면 그 나이가 익숙해질 시기가 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취업, 결혼... 이런 눈에 보이는 진도가 아니라,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진도 말이에요.



내가 태양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기만 하면,
햇빛을 가로막으면서 그림자를 드리우는 일을 멈출 수 있다는 것.
한 발짝 물러나서 햇빛이 모든 사람과 만물을 비추도록 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생명의 빛으로 만물을 무르익게 할 수 있다는 것.
바로 이것이 미워시가 말하는 사랑의 궁극적인 정의라고 나는 생각하며,
그런 풀이는 큰 도움이 된다.
- 같은 책, 38쪽


 


사실, 내가 태양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죠.

우리는 누구나 아무 것도 아닌 영혼이지만, 아무 것도 아니기를 거부하면서 자라니까요. 거창한 꿈을 꾸라고 배우고, 또 거창한 꿈을 삼키기도 합니다. 그때부터 형벌은 시작된다는 것도 알죠. 20대 마지막까지 세상에 꺾이면서 욕심을 버리는 법을 배운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서른 지나 마흔 가까이 되면서는 체력도 약해지고 더 처절하게 굴러다니면서 '내려놓음'이라는 법에 대해 꽤나 알게 되었다고도 믿게 돼죠. 하루벌어 하루먹는 삶도 귀하다고 나를 꾸짖으며 인생에 순응했는데, 이제 먹고사는 것까지 욕심이라고 하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렇게 소리를 치고 싶은 날도 있습니다. 삶이 나에게서 또 무엇을 벗겨낼까 두려운 날도 있고요. 


실패는
나 자신과 내가 세상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냉정한 진실 앞에 나를 마주시킨다. 성공과 그것이 빚어내는 환상의 햇볕을 기분 좋게 쬐고 있을 때는 피하게 되는
 진실 앞에 서는 것이다.
실패는 명상적 삶이 취할 수 있는 여러 형태 가운데 하나다.

- 같은 책, 87쪽

 

사실, 모든 진리는 돌멩이처럼 굴러다니듯이 주위에 있다고 하죠.

실패를 겪고 아픔을 느낄 때마다, 덜컥 날아온 낯선 나이에 인생 전체가 흔들릴 때마다 그런 돌멩이 하나쯤 품에 굴러들어오곤 합니다. 그런데 그게 귀하게 느껴지기까지, 우리는 더 많이 철이 들어야 하죠. 당장 먹고사는 일이 급하고, 통장이 비었고, 몸 여기저기가 쑤시니 말이에요. 또 어떤 상실은 너무 오래 가고, 기어코 꺾이기도 하고요. 그래도 이런 글을 읽으며 그 진리라는 돌메이의 힘을 느낍니다. 자신의 경험으로 괜찮다고, 꺾이지 말라고 말해주는 여든 노인의 지혜로부터 보물을 하나씩 얻는 거죠. 

뱀은 허물을 벗고, 그리고 새로 태어나죠.

그래서 뱀은 영원을 상징하는 동물이 되었습니다.

파커J. 파머의 글처럼 그 상징이 붉은 실 하나가 되어주었죠. 



그리고 운이 따른다면, 
그 과정에서 당신은 누더기가 된 자신의 삶을 다시 짤 수 있는
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랑이라 부르는 그 빨간 실,
당신이 쥐고 있다가 다른 이에게
"당신 거예요."라고 말하면서 전해줄
그 실 말이다.

- 같은 책, 80쪽


낯선 나이가 언제 익숙해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전 나이를 잊고 살아요. 왜냐하면 고정관념의 힘이 워낙 커서, 제 삶의 진도에 집중하기가 어렵거든요... 그렇지만 그렇게 앓고 난 허물까지 잊은 건 아니에요. 그리고 뭔가 저도 빨간 실 하나는 얻은 것 같습니다. 

즐거워야 한다고 강요하는 이 크리스마스에,

(저는 유명한 사람도, 성공한 사람도, 아름다운 사람도 아니지만...)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어 가난한 마음에 허덕이는 나이 먹을 분들에게 드리고 싶어요.

"당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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