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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 Feb 05. 2020

열아홉, 스물

- 갑자기 어른이 되어 얼떨떨했던 어느 날

뭔가를 기다리는 시간은 깁니다.

버스나 지하철을 기다리거나 약속한 사람을 기다릴 때처럼 올 것이 분명한 대상을 기다리는 시간도 지루해할 때가 많지요.

그런가 하면 조마조마한 기다림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에게 고백을 한 다음, 미심쩍은 병의 검사를 한 다음, 사랑하는 사람이 수술실에 들어간 다음에는 기도하는 마음 뿐이지요.

그리고 어떤 기다림이 있습니다. 결과에 따라 인생의 시간을  멈추게도 하고, 미친 듯 빠르게 가속하기도 하는. 아인슈타인은 몰라도, 시간의 상대성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그런 기다림의 시간이 있죠.  대표적인 것이 일도 모두들 인생에서 중요하다고 말하는 두 가지, 입시와 취업입니다. 이 두 가지의 기다림은 우리들의 시간에 개성을 더해준다고 생각합니다.


 

백로즈음_ Acrylic on canvas, 97×130cm, 2012(강요배)


개성을 더해준다고 말하니, 굉장히 여유로운 느낌이네요.

하지만 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 저는 전혀 여유롭지 않습니다. 저는 이제 그 시간들을 지나보냈지만, 지금 누군가의 결과를 간절하게 기다리는 입장이니까요. 되돌려 시절을 떠올려 보아도,  입시와 취업, 어느 것 하나 다시 떠올리기 싫습니다. 여유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이 초조하고 괴로운 시간이었지요.

 입시를 시작으로 우리들의 시간은 각자 달라집니다. 똑같은 열아홉   스물이 아니죠

 누군가는 좀더 빨리 스물에 이르고, 누군가는 열아홉에 어래 머무르는 느낌이 듭니다. 또 누군가는 열아홉과 스물 사이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진자운동을 하는 기분으로 한 시절을 살기도 하죠.

  사춘기 내내 자신은 남과 다르다고 고집스레 주장해왔던 우리는 드디어 시간 감각마저 저마다 달라지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시절을 개성이 입혀지는 시간이라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저 괴로움의 시간이고, 빨리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겠죠. 왜냐하면 개인적인 경험과 상관없이 달력의 시간은 쉼없이 흘러가니까요.

 입시가 끝난 친구들은 전혀 느끼지 못할 위화감을 그렇지 않은 친구들만 느끼게 되지요. 대학입시에 도전하기 전까지, 한 살을 더 먹는다는 것과 새학년이 된다는 것은 같은 말이었습니다. 한 살을 더 먹으면 새로운 책과 새로운 반과 새로운 친구들이 저절로 다가왔지요.

 하지만 대학 1학년은, 열아홉에서 스물은 다릅니다. 한 살을 더 먹는 것과 새로운 학년이 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입니다. 새로운 학교, 새로운 교실, 새로운 친구....... 어떤 환경도 저절로 생겨나지 않습니다. 물론 12월 31일이 지나기 전에 대학이 정해진, 혹은 매년 그랬듯 개학 전에 모든 것이 정해진 경우에는 전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환경이 정해지지도, 그렇다고 이전의 환경에 머물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아니, 그 수가 훨씬 더 많지요. 그때부터 이상한 그래프가 그려지기 시작합니다. 시간축은 양으로 움직이는데, 공간축은 양으로든 음으로든 움직일 수가 없지요. 그렇다고 0이 될 수도 없고요.......


 “대학이 아니면 졸업한 다음에 뭘 할 건데?”
 “몰라. 솔직히 뇌에 소독된 수영장 물이 꽉 찬 기분이야. 대학이고 뭐고 감이 안 잡힌다고. 그런데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냐?”
 “나?”
 “너나 나나 멍한 건 마찬가지 아니냐고. 내년에 닥칠 일인데 이러고 살잖아.”
“응…….”
“하지만 너도 별로 뉘우치거나 변하겠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뭐, 억지로 그런 표정 지을 건 없어. 낮잠에서 막 깬 것처럼 멍한 상태로 대책 없이 성년이 되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열아홉이 나 스물이나 달라지는 건 전혀 없고 말이지. 12월 31일이나 1월 1일이나, 남들이 무슨 상관이냐고. 넌 스물이 되면 뭔가 확 달라 질 것 같은 느낌이 있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은서의 말대로 졸업 뒤라든가 어른이 된 후에, 라는 말을 들으면 귀에 물이 들어온 것처럼 세상 모든 것이 내게서 한 걸음 물러서는 것 같았다. 은서는 큭, 하고 웃더니 말을 이었다.
 “그럴 줄 알았어. 나는 말이지, 어른이 되기 직전엔 뭔가 불안감 같은 게 있을 줄 알았어. 시험 전날 같은 위기감 말이야. 그땐 벼락치기라도 하잖아. 시험 전날 벼락치기를 안 하는 건 두 부류야. 하나는 공부 다 해 놓은 모범생, 나머지 하나는 깨끗이 포기한 애들. 나는 이도저도 아니어서 나름 걱정은 했었거든. 그런데 이건 위기감 같은 것도 없어. 성년이 된다는데, 반년 지나면 어른이라는데, 아무 감각이 없다고. 넌 어느 편이야? 설마 인생 포기는 아닐 테고, 역시 팔자가 좋은 편인가? 아니면 뭐가 되는지도 모른 체 그저 컨베이어 벨트 위에 실려 가는 중인가?”
                                                                                                    - 졸저, <바다의 리라> 중

 좀 민망하지만, 열아홉에서 스물이 되는 솔직한 기분에 대해서 제게는 이 글이 최선입니다.

여행을 하는 중에는 정해진 곳이 없을 땐 숙소에 마음 편히 머물러 쉬거나, 카페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하거나, 그러다 지루하면 발길 닿는 데 어디든 가면 된다는 것을 아는데, 인생에서는 그게 자동으로 되지 않습니다. 일찍 뭔가를 알아채서 중간에 학교를 벗어난 사람이 아니라면, 보통 사람들이 시간과 공간에 대해 자발적으로 체험한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요.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에 익숙한 상태로 갑자기 세상에 내던져집니다. 수영도 배우지 않은 채 물에 던져진 느낌이랄까요?

스물은 어른의 시간이라는데, 스물은 자신의 선택과 삶에 책임을 져야 하는 시간이라는데, 스물은 자신의 길을 정해야 하는 시간이라는데, 정작 열아홉 마지막 날까지 우리는 어린아이여야 했습니다.  어른의 훈련을 받은 적이 없지요.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스스로 시간을 정하고, 스스로 방법을 만들어서 실패한 경험이 전혀 없는 채로, 실패하면 큰일난다는 분위기에 두려움만 커진 채로 우리는 어른의 시간을 맞이합니다.

그것은 마치 영화 <인셉션>의 한 장면 같은 순간입니다. 표적이 꿈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장면 말이죠.


"네가 뭘 할 수 있다고? 넌 하라는 대로만 해."

집에서, 학교에서, 학원에서 서포트와 프린트와 요약정리의 열아홉을 딱 하루 지났을 뿐인데,

"네 생각은 뭐니? 너도 이제 어른인데, 어떻게 할 생각이야?"

 안온했던 세상은 표적이 꿈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꿈을 만든 사람, 즉 꿈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질적 존재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우리라는 존재를 노려보던 모든 것이 점차 공격을 하다가는 마침내 죽일 듯 달려듭니다. 아름답고 평온했던 세상이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합니다.  

스물에게, 현실이죠. 이 영화 속 세상이.

온 세상이 나만 바라보는 것 같은 시간이 시작됩니다.


영화 <인셉션> 중

무섭지 않은 스물이 어디 있을까요?

갈 곳이라도 정해진 스물들은 그나마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와 생각하면 그것이 과연 나은 일인지 의문이 들지만, 우선은 숨을 곳이라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저 많은 질문들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숨을 곳도 정해지지 않은 스물들은 마치 낙제한 학생처럼 느껴지지요. 좌표가 정해지지 않은 스물들은 숨을 곳이 없어 잔뜩 웅크리게 됩니다.

처음으로 세상은 내가 없어도 흘러간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한번도 나를 빼놓은 적 없던 세상의 시간표가 아주 잘 흘러가는 것을 시간표 밖에서 볼 수밖에 없으니까요. 너무 두려워서  허우적거리지도 못한 채 무력하게 소독된 물에 잠겨진 느낌, 아마도 많은 스무 살이 그런 기분일 니다.

    

Edward Hopper, Rooms by the Sea(1951)


스무 살이 지나도 이런 기분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스무 살 이후의 삶이 주동적이며 선택에 대한 책임이 따르는 삶이라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죠. 수영장 물에 뇌가 소독된 느낌, 시간과 공간의 좌표를 찾을 수 없어 멍한 그 느낌도 주동적으로 마주하지 않는 한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스무 살에 갈 곳이 있었던, 그래서 숨을 곳이 있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시간표가 나를 빼고 흘러갈 때 그것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아프지만 인정하고,  머리 아프게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은 언젠가 그 상황에 다시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것이 취업시즌이든, 명퇴시즌이든, 혹은 정년퇴직 시즌이든 가릴 것 없이 말이지요.


세상과 나의 분리라는 면에서, 이것은 어른의 덕목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어른이라는 학위가 있다면,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식은 필수전공과목에 해당될 것 같아요. 피하면 졸업할 수 없는,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어른이 될 수 없는 그런 인식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이 필수전공과목을 이수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옛 어른들이 말씀하셨듯, 젊을 때 고생하는 편이 훨씬 나으니까요. 괴로워서 밤새 술을 마셔도 다음 날이면 회복될 간 건강이 있고, 객기로 길거리에서 울고 소리질러도 젊은 것들이라며 혀를 몇 번 찰 뿐이지 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고, 한 몇 년쯤 헤매고 다니다 뭔가 계획을 세워도 여전히 젊으니까요. 정년퇴직한 후에 세상이 나를 빼놓고 흘러간다고 느낄 때의 그 소외감을 마주할 때의 정신적 체력적 소모는... 아마도 삶의 시간을 몇 년간 단축시킬 정도로 클 것입니다. 하지만 젊을 때는 상관없지요.

  

Between Red-85, Oil on Linen, 300×400cm, 2009.(이세현)

 

 간절하게 기다리는 소식이 있는 처지에, 어른의 필수전공과목을 이수하라고 그 소식이 오지 않기를 바랄 배짱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소식이 오지 않는다 해도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말은 분명히 해줄 수 있습니다. 인생에 있어 몇 가지 진리가 있다는 말은 꼭 하고 싶은 것이죠.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은 정말 몇 안 되는 진리입니다. 아직 기다리는 소식이 없는 분들에게 위로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라, 살면서 모두가 겪을 진리죠. 스무 살에 여전히 꿈처럼 평온한 세상을 살고, 취업 시즌에도 부모 덕에 평탄한 삶을 살고, 결혼하고도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죠. 소위 금수저라고 하는 사람들이요.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금수저를 많이 알지 못하니까요. 하지만 모든 사람들의 희노애락의 수준 차는 있어도 감정적인 무게차는 없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참, 모든 사람에게 냉정하고 차갑지요. 그 사실을 언제 알든 상관없이 매정합니다. 그러니 빨리 아는 것이 그나마 이득이지요.


Gideon Rubin, Back cat


단지, 이 기다림의 시간을 한 마디로 정의내리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기다림의 결과가 언제 오든, 아예 오지 않아 다른 길로 향하든, '실패'라고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에요.

사실은 '성공'이라고도 말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여행 중에 일정이 정해지지 않은 날을 '실패'라고 하지 않듯이, 정해지지 않았다가 우연히 핫스팟을 찾아가게 되었다고 '성공'이라고 말하지 않듯이.... 그저 그 모든 것을 합쳐서 '여행'이라고 말하듯이 말이죠.

그저, 이 모든 것을 '인생'이라고 말했으면 좋겠습니다.

속상해서 술을 마시든, 친구들과 울며불며 헤매든, 아니면 세상 사람 구경이나 한동안 하든.......

인생에 쓸 데 없는 시간은 없습니다.

우리는 실패하거나 성공하려고 사는 게 아니니까요.


  실패는 나 자신과 내가 세상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냉정한 진실 앞에 나를 마주시킨다. 성공과 그것이 빚어내는 환상의 햇볕을 기분 좋게 쬐고 있을 때는 피하게 되는 진실 앞에 서는 것이다.실패는 명상적 삶이 취할 수 있는 여러 형태 가운데 하나다.
                     -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파커 J. 파머 저/ 김찬호,정하린 역/ 글항아리 펴냄,  87쪽

우리의 기다림에 대해 정의내리려는 사람에게는 분노하라고 미국의 교사라고 불리는 80대 할아버지가 가르쳐주셨으니까, 우리는 그래도 될 겁니다.

  

Gideon Rubin, Untit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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