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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 May 23. 2020

언젠가는 기쁘게 대가를 치르기를...

- 인생의 빛, 인생의 빚 

<모모> 삽화, 비룡소


이렇게 말하면 참 우습지만, 책을 읽고 무릎 꿇는 심정이 된 경험은 딱 한 번이었습니다.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

한 달 내내 틀어박혀 <토지>를 읽었는데, 마지막 장을 덮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다시 읽어야겠다.'였습니다.

한 사람의 사유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거대한 우주를 망원경으로 한번 들여다본 심정...

얼마나 공부를 해야 저 우주를 이해할 수 있을까 절망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납니다.

그래서 저는 어디에서 <토지>를 읽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남들에게 권하기는 하지만....



나는 독자를 위해서 글을 쓴다는 말도 우습게 생각합니다.
독자를 위해서 글을 쓴다면 종놈 신세 아닙니까?
독자들 입맛에 맞게 반찬 만들고 상차림을 해야 하니 영락없는 종놈 신세지 뭡니까. 
문학은 오로지 정신의 산물인데, 그렇게 하면 올바른 문학이 탄생할 수 없습니다.

박경리, "생명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 중앙일보, 2008/5/24



예전 제가 다니던 문예창작학과는 분류는 인문학부에 실제 과는 예술학부에 속해 있었습니다.

어디 소속이냐고 어이없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이처럼 정직한 분류가 또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예술은 예술이지만, 사람은 음도 색도 선도 아닌 말로 사유하는 존재이기에 그것을 다루다보니 결국 인문학에 닿아있을 수밖에 없죠. 그래서 문학을 향유하는 감상도 다양하게 마련인데, 예술적인 향취에 흠뻑 취하게도 하고 인문학적 번뜩임에 통찰을 배우기도 하며 깊은 사유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합니다.

저 역시 아름다워서 두근거린 경험, 충격에 오래 빠졌던 경험, 너무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몰랐던 경험, 오랜 세월이 흘러도 다시 생각나는 그리움 등 다양한 경험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경험을 동시에 누린 경험은 많지 않은데, 우리나라에는 그런 종류의 장르가 있습니다.

대하소설.... 하지만 대하소설이 어떤 수준과 경지를 일관성있게 유지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선 그 많은 권수를 끌어나가려면 독자의 지지가 있어야 하기에 대중적일 수밖에 없는 부분이 생기고, 또 그 많은 권수 때문에 다양하게 변주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대하소설이라 할 수는 없지만, 생각해보면 톨스토이도 반 대하소설급 소설을 쓴 작가라 그 내용들 중에 편차가 없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박경리 선생님이 그걸 해낼 수 있던 이유는 독자를 "무시(!)"한 처사였나 봅니다.


물론 나쁜 의미는 아닙니다. 모든 예술가는 결국 자기를 위해 예술을 하니까요. needs를 생각하는 것은 장사꾼입니다. 그런데 예술가는 자아 실현을 위한 무익한 행위를 하는 인간이니 예술가가 가난한 것은 필연이며,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박연 그림, <빨간머리 앤> 삽화



생각해보면 나는 단 한 번도 소설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늘 생활비를 벌려고 애면글면 고통스러웠네요. 전업작가가 꿈이기는 했지만, 내가 생활을 할 만큼 돈을 벌 거라는 기대는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문학을 대단하게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떤 기준을 통과해야 한다고 철썩같이 믿었기에 습작 시간을 오래 지나왔고, 등단을 한 이후에도 전업작가는 남의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제가 특별히 꿈이 작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쥬라기 공원>의 원작을 쓴 마이클 크라이튼의 이야기를 들어보아도, 저는 아주 현실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 

마이클 크라이튼은 작가가 되기 위해 대학을 갔지만, 졸업 무렵에 의대를 가기로 합니다. 그런데 그는 의대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쓴 작품이 몇 백만 부를 팔릴 정도로 태어난 베스트셀러 작가입니다. 그런 그가 의대를 가기로 한 이유는 매우 합리적입니다. 그 당시 미국의 전업작가가 200명밖에 안 되니 미래가 불투명해서였다는 것이죠. 물론 그는 의사로서가 아니라 전업작가로서 엄청난 부를 쌓았지만, 그 정도의 천재도 포기하는 길이니 저 같은 범재들은 계산도 서지 않는 길인 거죠.  


 요즘 모두가 글을 쓸 수 있다고 말하지만, 문학도 역시 그럴까.... 

저는 문학에 대해서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글이라는 건 누구나 쓸 수 있지만, 문학은 역시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래서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없는 문학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런 것만 같습니다. 이런 상황을 이해하고 있고, 전업작가를 쳐다보지도 못하는 처지라 마치 청정한 예술가인 것처럼 미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소싯적부터 저도 많은 사람들이 제 글을 읽어주기를 바랐습니다. 박경리 선생님 말씀처럼 문학이란 작가 정신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누군가 읽어주지 않는 글이 일기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떨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의기소침은 이것이 굉장히 이상한 말이라는 것을 늦게야 알았던 탓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읽어준다면 돈을 못 벌 수가 없는 일인데, 생활비를 버느라 한밤중과 신새벽에 글을 쓰는 것이 당연하다고 체념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요...




변명을 하자면, 그래도 열심히 쓰고 열심히 생활비를 벌면서 살면 언젠가 예쁜 집에서 글만 쓰며 살 줄 알았습니다. 저도 성실함의 세뇌에 빠진 이 나라의 청소년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 꿈꾸던 나이가 되어 보니, 제가 생각했던 삶은 여전히 꿈이네요.


박연 그림, <빨간머리 앤> 삽화, 이하 동일

어디 꿈 뿐인가요? 가족, 친구들과 수다스럽게 말했던 우리 미래의 어느 날... 가령,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환한 얼굴로 다같이 수다를 떨 시간을 갖게 될 거라는, 소소하다고 생각한 일상의 풍경도 이제 이룰 수 있을지조차 모르게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바쁘고 시간 맞추기가 어렵죠.  우리가 날 좋은 어느 날 만나기 어려운 이유도 따지고보면 역시 먹고사는 일의 고단함 때문입니다.


한동안 이유없이 아파서 많이 서글펐습니다.

전에는 글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서 괴로웠는데, 아픈 날이 많아지니 쓰고 싶은 글을 쓸 시간이 없어지더군요. 하지만 불현듯 깨달았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서 살아가는 대가를 또 이렇게 치르는 것이라는 것을. 어릴 적의 꿈과 다르다고 화를 낼 필요가 없이, 생활비를 벌듯 몸이 약해지고 자주 아픈 것도 삶의 당연한 과정이라는 것을.

한번도 공짜로 살아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그렇게 생각하니 납득이 되었습니다.

다만, 대가를 좀더 기쁘게 치르게 마음이 넓어지고 싶을뿐....



인생의 대차대조표를 계산해보았습니다. 젊을 때는 체력이 좋아 서툰 밥벌이를 배울 수 있었고, 글도 쓸 수 있었고, 인간관계를 위해 가끔 놀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체력이 가용 시간의 30%는 빼앗아간 느낌입니다. 그러다보니 치러야 할 대가가 더 있구요.


인간관계랄까...... 일상적인 회식이라든가, 사람들과의 친목도모를 위한 모임 같은 것은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나의 관계가 더 고립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시간이 많지않다는 생각에, 그 고독마저 내가 감당해야 할 것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모두가 버거운 삶이기에 구태여 누군가를 돌아보지는 않으니까요.


세월이 흘러서 나이도 많아지고 건강도 예전만 못하니
세상을 비관하고 절망을 느낄 법도 한데 나는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인생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문학에 일생을 바쳐온 사람인데도 시간이 흐를수록 문학을 자꾸 낮춰 보는 시각을 갖게 됩니다.
나는 평소에 어떤 이데올로기도 생존을 능가할 수 없다고 말해왔습니다.
글을 쓰는 행위는 가치 있는 일이지만 살아가는 행위보다 아름다울 수는 없습니다.
요즘에는 그러한 생각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살아 있는 것, 생명이 가장 아름답다는 생각이 요즘처럼 그렇게 소중할 때가 없습니다.

박경리, 위와 동일



박경리 선생님은 생존이 글쓰기보다 더 아름답다고 하셨지만, 저는 아직 덜 여물어서 그런지 지금은 글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를 살았던 후학으로서, 박경리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그 '생존'이 신자유주의에서 어떻게 이용되었는지를 알고 있죠.

모든 것이 '생존'이라는 이데올로기에 휩쓸려 모든 추함이 사면되고, 모든 뻔뻔함이 이해되었습니다. 그리고 문학을 비롯한 아름다움은 '생존'하는데 도움되지 못하는 것으로 치부되며 죽어갔죠.


하지만 저 역시 생명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자신의 생명과 글을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생명이라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아직은 절체절명이 아니므로, 글을 씁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대가를 치릅니다.


최대한 감사하게... 대가를 치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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