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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 Jul 25. 2020

네가 진짜로 먹은 떡이 뭐야?

- 한반도 호랑이의 특이 식성에 대한 쓸데없는푸드  추리

"떡 하나 주면 안 잡아 먹지~"

한국인치고 이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이 말이 어떤 이야기에서 온 말인지 헷갈리는 사람일지라 하더라도, 이 대사가 호랑이의 것이라는 것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죠. 이 건달 같은 호랑이에게 위협을 당한 사람이 엄마 혹은 할머니라는 것까지 기억해내면 대충 나머지 이야기도 떠오를 것입니다.

이렇게 호랑이 이야기는 우리나라 설화에서 변별성이 없습니다. 워낙 많기 때문이죠.

그러니 이 대사가 어떤 전설에서 나온 건지 헷갈린다 해도 스스로를 탓하지 않아도 됩니다.


조선은 호담국虎談國(호랑이 이야기의 나라)이라 할 만큼  
범 이야기의 특수한 인연을 가진 곳이다. 
-최남선 <동아일보> 1926 


아직 친일을 하기 전, 최남선이 우리나라에 대한 자부심으로 했던 말입니다. 최남선의 학문과 독서의 양은 아직도 회자되는 정도이므로 호랑이 설화에 대한 그의 언급은 신뢰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최남선의 말이 아니라도 우리 설화에 특별히 많이 나오는 동물 중 다섯 손가락 안에 호랑이가 나온다는 것에 동의할 테고요.

생각해보면 이상합니다. 우리 민족과 친한 동물이라면 호랑이 보다는 곰이라고 생각했는데, 설화에서 곰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의외로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왜 곰과 더 친하다고 생각하느냐구요? 그야, 우리는 환웅의 후손이기도 하지만, 웅녀의 후손이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웅녀의 전신前身은 곰입니다. 

민족이니 혈통이니 우스운 얘기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만, 한 가지 국뽕은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다른 민족이 가지지 못한 특별한 비법을 갖고 있지요. 바로 사람되는 법.

여러분도 다 아시지요? 어떤 짐승이라도 쑥과 마늘만 삼칠일을 먹으면 사람이 된다고 환웅님이 그러셨지요. 

그 어려운 일을 해낸 동물이 곰이니 혈연 상으로 치자면 훨씬 가까운 사이인데, 설화 속에는 뛰쳐 나가서 결국 사람이 못된 호랑이가 톱 배우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이상할 밖에요.......


최현문 그림/웅진씽크하우스

 한반도에 호랑이가 그렇게 많이 살았다면 곰도 그렇게 많이 살았겠죠. 하지만 호랑이는 '호환마마'라는 말처럼 사람들에게 위협의 존재이기도 하고, 경외의 존재이기도 하면서 무력을 자랑하고 싶은 남자들에게는 사냥감이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우리 민족의 삶에 한 부분을 차지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지만 제가 궁금했던 것은 왜 호랑이가 톱 배우였나가 아니라, 호랑이가 먹은 떡의 정체는 무엇이었나였습니다. 얼마나 맛있는 떡이기에 하나씩 하나씩 빼앗아 먹으려 했을까, 궁금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생각난 김에 자료를 한번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공부하면서 후회했습니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는 제가 어릴 때 이모한테 들었던 것보다 열 배는 더 잔혹한 이야기였지 뭐예요...  게다가 지역마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많이 달라서 잔혹함의 수준도 천차만별이었습니다. 그래도 떡의 정체를 찾아보는 데는 도움이 좀 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잔치 때 쓰는 떡이었습니다.

제가 들었던 이야기 속 엄마는 재 너머 잔치집 일을 도와주고 떡을 얻어 오누이가 있는 집으로 가던 길이었거든요. 그래서 조선 시대에는 잔치 때 어떤 떡을 해먹었는지 궁금했지요.

조선 시대 잔치 떡의 종류는 기본적으로 설기라고 합니다. 설기는 우리가 백설기로 알고 있는 떡인데, 팥시루떡도 그 종류 중의 하나라고 하죠. 결혼식 때는 봉치떡이라고 해서 시루 채 떡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설기를 숭상한다. 가례에 쓰는 자고(餈糕)가 이것이다. 또, 멥쌀가루에 습기를 준 다음 시루에 넣어 떡이 되도록 오래 익힌다. 이것을 백설기라 한다.
- 이익, <성호사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하지만 잔치가 결혼식만 있는 것도 아니죠. 회갑잔치, 돌잔치도 있을 테고, 그때마다 먹는 떡도 다 달랐을 겁니다.

잔치떡: 수수경단, 백설기, 인절미

그리고 엄마가 제사를 도와주러 갔다가 오는 길이었다면요?

제사떡: 고임떡, 편

이렇게나 종류가 많으니, 도저히 호랑이가 무슨 떡을 먹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동화의 형태가 아니라 원래 구전된 설화들을 살펴보니 지방에 따라서 떡의 종류가 명확히 나온 경우가 몇몇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들 딸을 두고 인제 베를 짜러 갔거든.
베를 매주러 갔거던.  옛날에 배 무녕(무명) 짜구 베 짜는 그걸 매주러 갔거든.
그러니깐 하루품씩 하루품삯 받아가지구서 인제 먹구 사는데, 한날은 그쌈(사람)네가 메물(메밀) 범벅을 쒀서 한 암박을 주드랴. 하나 주드랴. 가주 가서 아이들 주라구.
그래 이 놈의 메물범벅을 인제 이구선 오는데, 아 오다가 호랑이를  만났지.
“할멈, 할멈. 그 메물범벅 한 덩어리 주. 주만 안 잡아 먹지.”

                   - 김순이 구연, 경기도 강화군/ 왕실도서관장서각아카이브


옛날 어느 어머니가 등너머 어떤 장자 집에 방아품을 팔러갔다가 묵을 얻어가지고 밤에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산모퉁이에서 범을 만났다.“묵 좀 주면 안잡아먹지” 하 기에 한 개를 주었다.

-손진태, <한국민족설화연구(1946)> 중


   

옛날 어느 산 속에 한 여자가 아이 셋을 데리고 살고 있었다. 여자는 남의 집에 방아품을 팔면서 가난한 집안 살림을 꾸려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가 부잣집에 가서 하루 종일 방아품을 팔고 밤늦게 개떡을 얻어 집으로 돌아오는데, 고개를 하나 넘으니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호랑이는 길을 막고 앉아 여자에게 가지고 있는 개떡을 주면 안 잡아먹겠다고 하였다.
 
 -조영주, 경기도 양주시 전승, 디지털양주문화대전    

제가 찾은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런데 순화된 이야기가 아닌, 전승된 이야기는 훨씬 잔인했습니다. 어머니는 싱글맘이고 아이는 원래 셋인 경우가 많더군요. 그리고 단순히 잔치에 일 한번 가주러 간 게 아니라 베를 짜거나 방아찧는 일을 도와주는 등 단순 일용노동자였구요. 호랑이는 산등성이에서 만나기 쉬운 재앙이지만, 여자의 바깥 출입이 쉽지 않았던 것은 조선 양반가 여인의 삶이지 빈민에게는 여성도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므로 호랑이는 그저 냉혹한 사회의 하나의 상징이겠지요.

이야기가 참혹한 이유는 어머니의 죽음이 특이해서입니다. 떡으로부터 시작해서 옷, 팔다리부터 시작해서 머리통까지, 하나하나 해체되는 죽음이 설화로서는 매우 특이한 죽음인데요.... 그 어머니의 자식인 오누이가 해와 달이 된다는 결과를 볼 때 그 상징성이 매우 강한 설화라는 생각이 새삼 들더라구요.

  

하지만 오늘은 호랑이가 먹은 떡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시작한 이야기니까, 샛길로 새진 않으려 합니다.

그나저나 한반도의 호랑이는 식성이 참 특이합니다.

떡과 메밀범벅, 심지어는 묵까지 탐내는 데다 다른 이야기에서는 팥죽을 얻어먹겠다고 1년도 기다리니까요. 그런 정도면 왜 쑥과 마늘을 못 먹었는지 이해가 안 되는데, 생각해보니 탄수화물 중독이었나 봅니다. (마늘을 구워먹었으면 좀 견뎠....)

궁중떡- 두텁떡, 각색주악, 웃기떡

그런데 민중 속에 떠다닌 설화다 보니, 나오는 먹거리도 초라하다 못해 비루합니다.

종일 일해주고, 전승되는 지역에 따라서는 며칠에 겨우 한번 어쩌다가 준다는 것이 메밀범벅 한 덩이나 묵 한 덩이, 아니면 개떡 몇 개였죠.

궁중과 고관대작 집에서 먹었던 흰 쌀과 찹쌀을 몇 번 체에 거르고 온갖 견과류를 넣어 만든 두텁떡과 귀한 식물성 기름으로 튀긴 주악이며 공교한 손재주를 자랑하는 웃기떡 같은 것은 이름도 몰랐겠죠.

아니, 호랑이가 고기를 먹는 짐승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가난한 과부에게 일당으로 고기를 내 줄 집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양보해서 떡이나 묵으로 대치한 것이겠죠.

그래서 때로는 어수룩하게, 때로는 재미지게, 때로는 잔인하게 이 땅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아온 한반도의 호랑이들은 탄수화물에 중독된 식성을 가졌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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