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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 Aug 07. 2020

값이 싸요.

- 파전, <재봉사 로타>와 함께

재봉사 로타는 만으로 열아홉 살입니다.

시내에서 가장 유명한 의상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 의상실은 귀족 부인들 사이에서는 아주 유명합니다.

유행하는 옷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예 유행을 만들어내는 곳이거든요.

그렇다고 인위적으로 유행을 따르는 것도 아닙니다.

아직 유럽왕실이 한 집안이었던 시절, 이 나라 여왕님이 이웃나라 조카 왕을 걱정하는 시절이니 샤넬이 태어나기 전이었을 거예요. 아직 패션계라는 것이 없었을 때니, 패션쇼도 없었을 때고, 의상실 주인 따위가 쇼를 할  때도 아니었죠.  

하지만 이 의상실이 유명했던 것은 귀족부인들에게 패션을 제안했기 때문입니다.

어울리지 않는 스타일을 이야기하더라도 의상실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로 귀족 부인과 아가씨들의 아름다움을 더해주었죠. 모든 여자들이 아름다움을 좋아해요. 그러니 의상에 대한 의견 같은 것이 뭐가 중요하겠어요. 의상실이 만들어준 것이 자신을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주는데 말이에요.

의상실은 말하자면, 디자이너샵의 모태였던 셈입니다.


하지만 이 의상실에는 비밀이 있습니다.

스타일의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이 바로 어린 재봉사 로타라는 것이죠.

그 시절에 샤넬이 있었다면 그건 바로 로타였을 겁니다.

출처: 엘르/ 디즈니 속 공주 드레스

어느 날, 열아홉 살 로타가 바빠지게 됩니다.

로타 만이 아니죠. 열아홉살 6개월에 허리가 50센치인 세 귀족 아가씨도 느닷없는 결혼준비에 바빠집니다.

원인은 늙은 여왕님의 노파심.

여왕님은 이웃나라 왕인 조카의 비혼 라이프가 마음에 안 듭니다.

결혼하라고 몇 번이나 편지를 써도 요리조리 빠져나가기 바쁘죠.

하지만 이번에는 절대 피할 수 없게 최후통첩을 해버립니다.

그러자 이 조카 왕은 '나이는 열아홉에 허리는 더도말고 덜도말고 50센치인 여자 중 하나와 결혼'하겠다고 답장을 보내죠.

그 조카의 그 여왕, 기어코 그 조건에 맞는 귀족 아가씨 3명을 찾아냅니다.

이름하여, 요구르트 아가씨, 캐러멜 아가씨, 푸린 아가씨.

이 귀족 아가씨들의 다음 코스는?

뻔하죠. 로타네 의상실입니다.

이렇게 하여 열아홉 살 난 네 명의 아가씨들이 눈코뜰 새 없이 바빠진 것인데, 누구보다 바쁜 것은 세 아가씨의 무도회 드레스를 도맡게 된 로타입니다.


디자이너답게 로타는 요구르트 아가씨를 위해 햇빛 같은 드레스를 떠올립니다.

밤을 새워 황금빛 옷감과 황금빛 실로 정성스레 드레스를 만들고 나니, 요구르트 아가씨가 궁궐 무도회장까지 배달을 해달라네요. 당연하죠. 구겨지면 안 될 테니까요. 마네킹도 없던 시절이라 걱정을 하던 주인은 로타에게 드레스를 입혀 보냅니다. 마침, 로타의 허리도 50센치였거든요.(부럽...ㅋ)

  

출처: 엘르


로타는 퇴근하지 못합니다.

다음 날에도 무도회가 열릴 예정이었거든요.

로타는 의상실에서 캐러멜 아가씨를 위한 달빛 드레스를 만듭니다.

눈부시게 새하얀 달빛처럼 아름다운 드레스 역시 로타가 직접 입고 궁궐까지 배달합니다.

Ningbo TAOPU boutique Store


이틀 밤을 샌 후에도 로타는 의상실로 돌아옵니다.

망할놈의 조카 왕이 무도회 일정을 연이어 잡았거든요.

여왕의 상속권에만 관심이 있는 혈기방장한 젊은 왕을 결혼이라는 굴레로 불러들인 여왕도 유죄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그리하여 불쌍한 로타는 사흘 밤을 새야 합니다.

푸린 아가씨를 위해 지어야 할 드레스는 무지개 드레스.

어젯밤까지는 자신의 드레스 차림에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던 로타지만, 이번에는 눈을 뜨고 있을 힘도 없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드레스를 입고 궁궐까지 배달을 가죠.

파올로 세바스찬 드레스

그런데 이 무도회장 대기실에서 로타가 만났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왕의 시종이라는 남자였는데, 로타와 그는 첫날부터 무도회에서 드레스 차림으로 춤을 추었죠.

남자는 첫날에는 황금빛 햇빛 드레스를 입은 로타에게 '당신의 머리카락이 황금처럼 빛난다.'라고,

두 번째 날에는 로타의 손이 달빛처럼 희고 곱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말하지 못했습니다.

세 번째 날에도 춤을 추려고 생각했는데, 로타는 너무 힘이 들어 일어서지도 못한 채 앉아서 눈물만 주르르 흘렸죠. 남자는 무지개에는 눈물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아무 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무도회가 끝났지만, 로타는 이번에도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내일은 결혼식이어서 결혼식 드레스를 만들어야만 했거든요.

로타는 비몽사몽 화려한 드레스를 만듭니다.

여왕이 가장 사랑하는 조카 왕은 아마도 여왕의 나라까지 물려받게 되겠지요.

그렇다면 요구르트, 캐러멜, 푸린 세 아가씨 중의 한 명은 세상에서 가장 부자인 왕의 왕비가 되는 셈입니다.

무도회장의 왕이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시종의 차림을 하고 나타났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그래도 온 나라가 어느 아가씨가 왕비가 될지 궁금해했습니다.  로타만 빼고요.

로타는 눈부신 웨딩드레스를 만들어, 늘 그랬듯이 궁궐로 배달을 갔습니다.


  

출처: 코스모폴리탄


그런데 궁궐에 도착하자 갑자기 마차가 로타 앞에 서더니, 로타를 번쩍 태우고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로타는 너무 졸려서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참을 달려 교회에 도착하고, 결혼식이 열렸지만, 잠들어 있던 로타는 꿈결의 일이라고만 생각했죠. 로타는 진짜 결혼을 한 것일까요? 했다면 누구와 결혼했을까요? ...


<재봉사 로타>는 영국 작가 엘레노어 파전의 단편 동화입니다.

특유의 시 같은 표현과 유머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좋아하는 작가인데, 로타의 이야기는 특히나 드레스를 좋아하는 어린 여자아이에게는 꿈 같은 상상을 하기 딱 좋은 이야기였죠.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로타의 처지가 자꾸 눈에 밟히기도 했습니다.

열아홉 천재 디자이너 로타를 의상실 주인은 싼값에 부려먹고 있었거든요.

칭찬을 해주면 우쭐해서 자기 상점을 차릴까봐 칭찬도 안 해주고, 밤샘도 이렇게나 시키고 말이죠.

첫눈에 반한 남자와 자신이 만든 가장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결혼을 해서 지금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결혼을 했으니 아무도 이용하지 못할 테고, 그 천재성과 성실함이면 성공한 의상실 주인이 되었을 테니까요.


 

디즈니 <신데렐라>

사실, 동화가 동화로 읽히지 않게 되는 건 자신이 인생의 쓴맛을 보면서일 겁니다.

저도 젊은 시절에는  로타처럼 대충 '값이 싼' 그리고 '성실한' 사람이었거든요.

그리고 로타와 제 이 이야기가 'Latte is horse'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로타 보다 못한 패션업계의 젊은 노동자들, 못지 않은 방송계 스태프들, 문화예술계 입문자들..... 아, 셀 수 없이 많지요. 칭찬 한 마디 없이, 보장 하나  없이 도매금으로 넘어가는 수많은 로타들이.......


저는 어릴 때도 그런 것들을 거부하며 살았던 편입니다.

직업을 구해야 했던 졸업 즈음에, 글쓰기로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을 알게 되었죠.

아직은 습작생이었고, 사실 등단을 한다 해도 먹고살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현실.

먹고사는 일은 당면의 과제였고, 직업이란 스스로 찾아 옭아매야 하는 영원의 굴레이기도 했죠.

하지만 글을 놓을 수 없었던 젊은 시절의 저는, 꿈을 꾸는 바보들이 그러하듯 최소한의 타협점을 찾으려 머리를 굴렸습니다.

남들이 말하는 철딱서니 없는 삶을 살더라도 내 힘으로 생활을 해야만 한다는 상식을 가졌기 때문에요.

하지만 그렇게 알아본 일들은 하나같이 직업이라고 말하기 힘든 것들이었습니다.

어떤 곳, 정해진 시간에 나의 모든 것을 묶어놓는 것 이외의 일들에는 죄다 '프리랜서'라는 말이 붙었죠.

드라마나 영화에서 '프리랜서'는 연애하기 꽤 좋은 조건을 가진 부유한 캐릭터였지만,

현실에서는 간헐적 직업인을 지칭하는 말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일들은 '인맥', '경험', '노하우' 등을 내세우며 헐값이 매겨졌습니다.

인격적 대우를 받지 못하는 폭언이 비일비재한 곳도 많았죠.

용감한 사람들은 그곳에서 싸웠겠지만, 저는 그보다는 비겁했어요.

저는 그 일에 저를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의 일들이 두 번째, 세 번째로 하고 싶은 일이기는 했지만, 다행히 첫 번째로 하고 싶은 일이 있었기에 참을 수 있었죠.


그래도 저는 꽤 오래동안 프리랜서로 살아왔습니다.

간헐적일 수 있는 직업 상태를 최대한 길게 유지하면서요.

사무실에 매여있지 않을 뿐 일에 매여있기는 마찬가지였는데, 정신적 자유가 그때는 소중했었나 봅니다.


파전의 동화는 유쾌한 시 같습니다.

로타의 이야기를 읽으면 드레스 생각이 나서 반짝거리거든요.

언젠가 현재의 로타들이 제대로 자고 제 값을 받으며 햇빛 드레스와 달빛 드레스와 무지개 드레스를 만든다면 더 반짝반짝 활홀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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