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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기 위해 지은 죄는 용서받을 수 있을까?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

by pea


지금 저는 여행 중입니다.

배낭 여행의 특성 상 우리나라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이 젋은 친구들을 보게 되는데요,

여행지가 바뀔 때마다 보게 되는 많은 친구들이 같은 상징 하나를 품고 다닙니다.

우리나라에서 수많은 억측 속에 망각을 강요당하고 있는 이 리본...

반대편 먼 곳에서 볼 때마다 가슴 아리고, 또 다행스럽다는 마음에 위로를 받기도 합니다.

그리고 세월호를 생각할 때마다 뼈저리게 떠올리게 된 설화 한 편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실은... 오래 생각했기에 한번 정도 다른 블로그에 썼던 내용을 다시 정리하고 싶었습니다.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는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 유명한 전설입니다. 하멜른이라는 작은 도시에 어느 날부터 쥐가 창궐하고, 사람들이 생활할 수 없을 정도가 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별별 방법을 다 써보지만 백약이 무효죠..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나이가 자신이 쥐를 쫓아주겠다고 하고, 대신 큰 금액으로 사례해달라고 말합니다. 촌장은 이를 허락하지만,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내는 정말로 쥐를 없애줍니다. 당황한 촌장은 사례를 요구하는 사나이를 쫓아내는데, 이에 앙심을 품은 사나이가 쥐에게 했던 똑같은 방식으로 그 마을의 어린아이들을 남김없이 사라지게 만든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주요 내용입니다.

이것은 전설입니다. 전설은 실화에 바탕을 둔, 적어도 모티브만은 존재하는 이야기를 뜻합니다. 이 이야기 역시 그 전거가 확실합니다. 하멜른이라는 도시가 실제로 존재하고, 사건의 모티프가 된 시대도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피리부는 사나이 이야기는 500~600년 전, 독일 소도시 하멜른에서 실제로 비슷한 사건을 각색한 것이라고 합니다. 어떤 설에 의하면 당시 의 십자군 광풍에 휩쓸려 사라진 아이들이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중세 '어린이십자군' 실종 사건과 '쥐 쫓는 사내' 이야기가 결합된 것이라는 설도 있고요...


이 전설은 그러니까, 사라진 아이들이라는 충격적인 소재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에서 실체를 명확하게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이야기의 주인공이지만,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 전설에서 실재 존재했는지 아닌지 불명확한 것은 '피리부는 사나이'뿐입니다.


동화 속에서 피리부는 사나이는 악인이라기보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촌장에게 당한 억울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교훈을 걷어치운 전설 속에서 피리부는 사나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실종시킨 악인이겠지요... 만일 피리부는 사나이가 악역이라면, 그의 실체를 알 수 없다는 것은 얄궂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십자군 전쟁' 광풍에 중세 유럽이 휘말렸던 것도 사실이고, 그 광풍 속에 아이들마저 십자군에 뛰어든 이야기도 사실이며,아이들을 인신매매한 것도 역사적 사실입니다. 중세 유럽을 두려움에 떨게 만든 페스트와 쥐의 창궐 역시 사실이지요. 이 모든 끔찍한 것들은 사실인데, 악인 만이 모호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전설은...


믿을 수 없는 재앙과 피해자는 확실하지만, 가해자는 모호하게 남아있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전설 속이라 해도 가해자 '피리부는 사나이' 하나라고 할 수만은 없을 겁니다.그에게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마을 사람들이 근본적인 가해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책임을 물으면 될까요? 하지만 손가락을 누구에게 향하느냐 생각해보면, 하멜른의 지도자들의 물타기가 대단합니다. 결정은 촌장이 한다지만, 피리부는 사나이에게 지불할 돈을 마을 전체에서 걷자고 했고, 마을 사람들 모두 꺼려했죠. 화장실 갈 때 마음 다르고 올 때 마음 달랐던 것은 촌장 만이 아니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는 겁니다. 딱 지목할 수 있는 책임자가 지목되지 않았고 따라서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면에서 악인이 누구냐, 누구에게 책임을 묻느냐의 문제는 점점 모호해지기만 합니다.


이야기를 분석해보았으니, 다시 한번 뼈대만 정리해볼까요?



재앙과 피해자는 있지만,

가해자는 소재가 묘연하고, 진짜 가해자와 원흉은 대중 속에 숨어버려 익명화 되는 이야기.


생각나는 사건들이 많으실겁니다. 그러니 이건 600년 전의 유럽 저 시골구석의 전설 이야기가 아니지요. 이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 대한민국의 이야기인 겁니다.



다른 것이 하나 있다면, <피리부는 사나이>에서 한 존재 만은 함무라비 법전에 의거하여 그가 지목한 악인에게 복수를 했다는 것 뿐이지요.



전설에서 피리부는 사나이의 그 복수는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피리부는 사나이 개인의 복수이고, 두 번째는 마을 주민에 대한 복수이며, 세 번째는 저주의 완성이고, 네 번째는 두려움 속에 생존을 선택한 이들의 가슴을 짓누른 악몽의 실현인 동시에, 다섯째, 쥐와 그 자신이라는 악의 근원적 소멸이라는, 어찌보면 마을 사람들이 진정으로 바랬던 '끝이기도 합니다.



물론 피리 부는 사나이는 악입니다.

그러나 마을 주민들도 떳떳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상대적으로 주민들의 악마성은 희석되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악마성이라는 말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는 분도 계실 겁니다.

우선 그들은 참척의 고통을 겪는 피해자이기도 하고, 쥐떼에 고통받아 모든 가치관이 무너질 만큼 고통받았으며, 행운을 갖지 못한 자는 살아남을 수 없는 재난 속에 있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들은 다수였습니다.

피리 한 자루를 지닌 떠돌이 외지인에 비하면 강하며 그 수도 많았던 절대 다수 강자들...

그렇기에 그들이 피리 부는 사나이에게 한 행동은 폭력이었습니다.


"쥐떼에 거덜난 마을에서 우리도 살아야 했어."


하지만 절대 다수는 저 말에 동의했겠죠.

생존은 죄지은 사람들의 양심을 가볍게 해주는 힘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너희들은 인간이야,라는 보증이 됩니다. 피리 부는 사나이에서 마을 사람들을 동정만 한다면 우리는 희생당할 뻔했던 한 이방인을 외면하게 됩니다.

대중에 숨을 수 있는 논리는 주도면밀하여 사람들의 양심을 마비시키니까요.


그리고 그 대중들 중 누구라도 하멜른의 촌장이 될 수 있습니다.

한나 아렌트가 취재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될 수 있습니다.

언제든 죄를 짓고, 살기 위해서라고 변명할 수 있는 사람인 거죠.


우리는 '살기 위해 지은 죄는 용서할 수 있다'는 이 논리 속에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요즘에는 사람들의 양심이 좀더 무뎌져서 좀 덜 처절해도 괜찮습니다.

'경제발전을 위해'

'국가발전을 위해'

'국민통합(?)을 위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를 구태여 이해하면서 좀더 원색적으로 각색하주자면, '독재? 누구 덕에 먹고 살게 되었는데 은혜도 모르고...'겠죠.


아이들을 두고 약속을 했다는 건 인정, 즉 사람의 마음에 호소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방인이 사람의 마음에 응답한 직후, 촌장은 사람답지 않은 방법으로 그를 내쫓았지요. 그렇게 사람의 마음이 간단없이 무시된 뒤 남는 건 사적인 원한과 함무라비 이전 시대의 법뿐입니다.



1842년, 영국의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은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라는 전설을 바탕으로 한 시의 마지막을 이렇게 썼습니다.


“사람들은 갈라진 언덕 건너편의 기둥에

그 이야기를 써놓았습니다.

어떻게 아들딸을 도둑맞았는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하여

커다란 교회 창문에도 똑같은 이야기를 써놓았습니다.”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 김기택 옮김, 시공주니어


브라우닝에 의하면 하멜른 정부는 이 일에 함구하도록 명령했지만, 사람들은 이렇게 모든 일을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기록이란 잊지 않겠다는 의지인 동시에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첫 번째 발걸음이기 때문이겠지요.

그리고 그들이 남긴 기록을 통해 브라우닝은 그 모든 것을 보듬는 시를 남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억을 말살하려는 시간이 와

책임자를 지워버리려는 시도가 있어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 전설로부터 읽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 제 눈에는 마을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기록했다는 전설의 후일담이 아니라,

피리부는 사나이의 복수 이야기가 더 중심에 보입니다. 가장 힘없는 사람들을 핍박하며, 경제를 내세워 그 죄를 잊으려는 대중 속에 숨어 모호해진 책임자들.......


'사람의 마음'을 무시한 채 살기 위해 죄를 지으라고 강요하는 사회...


우리는 피리부는 사나이를 긍정할 수 없지요.

하지만 '살아남은 자'의 죄를 계속 사면하는

피해자에게 남은 것이 사적인 복수밖에 남아 있지 않는 한,

저주가 다시 실현될 것이라는 우리의 불안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쯤 살아남기 위해 죄를 짓는 것보다 차라리 죽음으로 삶을 증명할 수 있게 될까요?

피리부는 사나이의 복수에 아이들이 속절없이 사라지는 이야기를 용납하지 않고,

피해자 속에 숨은 가해 대중 스스로 악인은 우리라고 자백할 수 있게 될까요?


아이들을 온전히 지킨다는 것은

잊지 않는 것을 넘어

살아남는 것을 포기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일까요?

혹시 쥐떼는 우리가 양심을 보리고 대중속에 숨을 때마다 나타나는 징후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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